하늘이야기

알고 있기 때문에

홍성필 2018. 4. 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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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이르되 야훼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열하 6:25~30)

 위 구절은 이스라엘 9대 왕인 여호람 때의 일이며 사마리아가 아람 군대에 의해 오랫동안 포위되어 결국 식량이나 모든 물품이 동이 났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중에서 다른 곳을 찾아 보아도 이토록 처참한 상황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 앞날이 막막하고 절망의 밑바닥까지 이르게 되면 희망도 소망도 믿음도 기도도 감사도 찬송도 캄캄하게 막혀버릴 정도로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아무리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들어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눈앞에 닥친 문제만 확대경처럼 보이게 되어 천지가 뒤엎어져도 절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믿음만이 자리를 잡아, 그 외의 어떤 생각도 들어올 틈을 주지 않게 되고 맙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라는 복음성가 가사대로 정말 이럴 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율법에서 돼지나 나귀처럼 발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못하는 짐승을 먹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레 11:2~7), 그 나귀의 그것도 먹을 부분이 많지 않은 나귀 머리까지도 고가로 거래되었고, 하물며 비둘기 똥까지도 식량으로 사용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었던 여호람도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여인의 청을 듣고서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는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절규를 합니다. 그렇다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외면한 채 혼자서 호의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30절에 보니 속살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굵은 베옷은 그 표면이 매우 거칠었으므로 이를 속살에 입는다면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전성경사전에 의하면 검은 색이었을 것이라고 하며 슬픔과 고통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즉, 여호람 왕도 당시 처해있던 사마리아 성의 비극에 대해 심히 마음을 아파했으며, 아무리 간구를 해도 응답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까지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해결책도 말해주지 않는 당시 선지자였던 엘리사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열하 6:31).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죽이러 오는 사자가 이르자 대답하기를 고운 밀가루나 보리가 저가로 거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것도 몇 달 후 또는 몇 년 후가 아니라 바로 “내일 이맘때”에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의 참모장관은 이를 의심하여 “야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의심을 하자,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하였으며, 결국 다음 날 아람 군대는 하나님의 역사로 물러가게 되고 (열하 7:6) 그의 예언대로 성문을 열려 물가는 하락하고 참모장관도 그 사실을 보았으나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열하 7:16~17).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이라면 위에서 본 비참한 내용을 보아도 전혀 불안해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장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은 절대 우리 앞에 평탄한 길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난관을 앞에 두고 불안해하며 떨거나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수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인도해왔던 모세에 이어 젊은 나이에 그 자리를 물려받고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치러야 할 여호수아에게도 누차에 걸쳐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그 이후 하나님을 의지하여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 땅을 성공적으로 점령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도 “알고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고통을 당할 때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것을 알까” 하는 의심도 할 수 없도록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미리 당하고 가셨습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인생은 “다 이긴 축구시합”을 비디오로 다시 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 비디오에서 상대방 팀이 초반에 2점을 넣었건 3점을 넣었건 그 시합은 결과적으로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거든”(막 9:23)이 아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8)의 믿음으로 굳게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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