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39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홍성필 2022. 6. 7.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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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9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2022년 5월 8 설교 - 로마서 강해 82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2절~24절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2節~24節
“22.それでいて、もし神が、御怒りを示してご自分の力を知らせようと望んでおられたのに、滅ぼされるはずの怒りの器を、豊かな寛容をもって耐え忍ばれ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23.しかもそれが、栄光のためにあらかじめ備えられたあわれみの器に対して、ご自分の豊かな栄光を知らせ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24.このあわれみの器として、神は私たちを、ユダヤ人の中からだけでなく、異邦人の中からも召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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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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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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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2번째 시간으로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耐え忍ば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입니다만, 먼저 앞에 있는 두 구절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한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2절~2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2절~23절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2節~23節
“22.それでいて、もし神が、御怒りを示してご自分の力を知らせようと望んでおられたのに、滅ぼされるはずの怒りの器を、豊かな寛容をもって耐え忍ばれ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23.しかもそれが、栄光のためにあらかじめ備えられたあわれみの器に対して、ご自分の豊かな栄光を知らせ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자, 본문 이해에 앞서 우선 여기에 나와 있는 단어부터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2절과 23절에는 각각 <진노의 그릇(怒りの器)>과 <긍휼의 그릇(あわれみの器)>이라는 두 그릇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를 단순한 그릇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개역개정성경 외에 역시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온 새번역 선경에 의하면 <진노의 그릇>은 <진노의 대상>으로, 그리고 <긍휼의 그릇>은 <자비의 대상>으로 번역되어 있고,

한편 생명에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여긴 좀 길어요.

<진노의 그릇>은 <멸망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로, 그리고 <긍휼의 그릇>은 <영광을 받도록 미리 준비하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등장하는 <그릇>이라고 하는 단어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바꾸어 본다면, <진노의 그릇>은 <아직 구원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 <긍휼의 그릇>는 <이미 구원을 약속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어떨까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람들, 아직 구원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긍휼의 그릇>은 이미 구원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 이제 정리가 되셨죠? 그럼 여기서는 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살펴본다면, 먼저 22절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인을 벌하셨던 것을 알 수 있지요. 때로는 한 개인이나 가족을 벌하시기도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도시, 한 나라, 그리고 한 민족을 벌하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느 <진노의 그릇>, 아직 죄사함을 받지 못한 어떤 죄인을 보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이런 나쁜 놈이 있나. 내가 당장 벌을 내리리라……라고 생각하시고는 벌을 내리시려고 했습니다.

어? 그런데 그 순간 너무나도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참자……라고 하시고는 심판을 하려고 하셨던 그 팔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 다음에 23절을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하시려던 팔을 내려놓으신 이유에 대해서 적혀 있습니다.

23절에 의하면 이제 앞으로 영광 받기로 예비되어 있는, 이제 앞으로 구원 받기로 약속 되어 있는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를 더 쉽게 줄여서 말씀 드리자면, 지금 어느 죄인을 심판하다가 참으셨어요. 그 이유는, 그 죄인이 이뻐서가 아니라, 이미 믿음이 있는 우리 보라고 심판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라고 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보시면 참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뭐, 지금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으시겠지만,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해서 우리 주변에 정말 나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정말 나쁜 사람들을 보면 그러잖아요. 아휴, 귀신들은 저런 놈들 잡아가지 않고 뭐하나……그런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믿음이 없는 사람들만 하나요? 아휴, 참 주님은 왜 저런 인간들을 빨리빨리 데려가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저렇게 그냥 내버려 두실까…… 그런 생각 솔직히 해보신 적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우리 보라고 죄인들을 향한 심판을 참으신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약성경 중에서 한 권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서입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만, 부끄럽게도 성경을 한 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통독해 본 것이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냥 교회에만 다녔어요. 설교만 들었어요. 그리고 몇몇 성경구절과 찬송가만 알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이 서른이 되고서 성경을 읽는데, 그러면서 든 생각이 아, 나는 정말 초신자였구나. 성경을 정말 알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때까지 <하박국>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했어요. <오바댜> <스바냐> 라는 성경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 때까지 제가 얼마나 엉성한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처음 성경을 통독할 때에 인상 깊었던 것이 <요나>서였습니다. 요나서는 고작 4장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었습니다만, 저는 처음 읽었을 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다고 하면 좀 고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처음 요나서를 읽고 난 다음에는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어쩌면 사람의 심리를 이처럼 절묘하게 묘사했을까 하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요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 이름입니다. 요나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요나에게 말씀을 하세요.


요나 1장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니느웨에 가서, 너희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다 아신다. 이렇게 외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만 보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요. 사람이 와서 지금 당장 어디에 가서 걸어 다니면서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면 주저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요나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정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을 쳐요.

누구는 이 모습을 보고서 요나를 겁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그 비판이 이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이처럼 도망을 친 사람은 성경 어디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요나가 도망 쳤어? 그럼 어쩔 수 없지……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나를 택하셨습니다. 이는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도망을 간다고 하나님이 계획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부름을 뿌리치고 배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배가 풍랑을 만나요. 그 때 함게 배에 타고있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해보려고 짐을 다 바닷속으로 던져요. 그래도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만 같아요.

그래서 거기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풍랑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제비를 뽑아보자 했더니만, 요나가 뽑히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요나한테 묻습니다. 당신 도대체 누구냐. 당신이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이토록 폭풍이 불어서 우리가 죽게 되었느냐 하고 다그칩니다.

그러면 그 이유를 요나가 모르겠습니까. 그가 말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러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요나를 비난합니다. 너 왜 그랬냐. 너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잖아. 자,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살겠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요나가 하는 말이, 자기가 불순종해서 배가 뒤집히게 생겼으니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어떻게 생사람을 바다에 던지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지 배를 좀 안정시켜보려고 하지만 폭풍이 더 심해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요나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그를 바다로 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만 거짓말같이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잔잔해 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제 바다 속으로 빠져든 요나는 물에 빠져서 죽었느냐 하면,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 하셔서 물에 빠진 요나를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는 어땠을까요. 아이구. 바다에 빠진 것도 모자라서 물고기 머깃감이 되었구나. 이제는 정말 죽었다……싶었겠죠. 그런데 좀 이상해요. 그런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 소화액이 얼마나 독합니까. 금새 죽고 녹아버려서 물고기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데 아무리 있어도 멀쩡해요.

해도 없고 불빛도 없는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지, 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바닷속으로 내던짐을 당했는지, 그것도 모자라서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었는지 ……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내리신 사명을, 너는 니느웨에 가서 머지않아 임하게 될 심판을 선포하라고 하는 명령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이토록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살려 두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더니만, 하나님께서는 3일 만에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셨습니다. 그게 어디였겠습니까. 성경에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니느웨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쉽게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예, 사람이란 좀처럼 안 바뀝니다.

이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아, 이름이 비둘기라고 할 정도이니까 요나는 참 온순했을 것이다……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데, 아니, 생각해보세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갓난아기일 때에 붙여지는 것인데, 이름이 비둘기라고 해서 꼭 비둘기처럼 온순한 어른이 되라는 법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요나. 꽤 성깔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저는 요나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참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를 본다면, 어쩌면 내가 요나라도 똑같이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 요나는 이제 지난 날들을 회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나에게 임했어요. 그래서 순종하기 싫다고 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폭풍을 만나서 바닷속에 던져졌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물고기한테 먹혔습니다. 그런데도 안 죽고 3일 동안이나 살아있었어요. 그것 만도 신기한데 3일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여기까지 본다면 아무리 불순종하는 요나라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알았어요. 니느웨에 가겠습니다. 갈게요. 가면 될 거 아니에요.

이제 그는 니느웨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왜 니느웨에 가기 싫어 했을까요. 왜 니느웨에 가서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기 싫어 했을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앗수르는 상당히 위협적인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앗수르는 빨리 망해버려야 마땅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요?

그건 마치 일제 시대 때 독립을 바라고 있는 조선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는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러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당시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 사람한테 있어서는 일본이 빨리 망하는 것이 소원이고,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한테 있어서는 러시아가 곤경에 빠져서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 무자비한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가 천벌 받기를 원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요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그냥 심판하시려면 심판하실 것이지, 굳이 요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니느웨에 가서, 너희 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 라고 말을 했다가, 니느웨가 회개해서 멸망하지 않으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3일 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포합니다.

요나서 3장 3절에 의하면 니느웨의 넓이는 3일 동안 걸어 다녀야 할 정도였다고 해요. 그래. 딱 3일만 내가 선포하자. 그걸로 나는 순종한 거 아니냐.

어쩌면 요나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딱 3일만 순종하기로 하고 거리에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만, 그렇다고 열심히 외쳤겠어요? 그냥 뭐, 정말 지극히 형식적으로만 외쳤지 않았을까 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3일은 고사하고 딱 하루 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야야, 어떤 사람이 니느웨에 심판이 임한다고 했대. 어. 그래? 야, 이거 큰일났네. 그러면서 이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더니,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하면서 회개를 하기 시작 하더랍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그 소문이 당시 니느웨 왕의 귀한테 들어갔더니만, 왕이 아예 공문을 내리고 선포하기를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까지 금식을 하게 만들고는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그 내리시려던 심판을 결국 거두시게 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믿음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기뻐할 일이지요. 자기가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 백성들이 모두 다 회개를 하고 멸망을 면한 것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이 당시 요나가 머릿속에 그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에서 심판을 선포하는데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요. 그랬더니 결국은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져서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게 되는 것을 상상하지 않았을까요.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지,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고, 그리고 적대국인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위기는 해소가 되고, 그리고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이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가 요나라고 하는데, 그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니느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뭐 이러면 와, 요나 선지자도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이제 요나 선지자님의 말씀을 잘 들여야겠다……이렇게 요나의 이름값도 올라갈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는 어떻게 되었어요.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이렇게 되니까 결국 니느웨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도 않고, 이스라엘에 대한 위기도 해소되지 않고, 그리고 자기 이름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자, 요나는 이제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하나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도망 갔었던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요나는 집으로 돌아갔느냐……하면, 아니에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또 몰라. 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다가 말고 또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져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니느웨 인근에 초막(仮小屋)을 짓고는 언제 망하나 하고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막이 별거 였겠습니까. 나뭇가지를 엮어서 대충 만든 엉성한 작은 집이었겠지요.

거기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니까 햇빛이 뜨거웠나보죠? 나무들을 엮어서 만든 지붕 사이로 뜨거운 햇빛이 새어 들어오니까, 하나님께서 지붕에 박넝쿨을 나게 하시고는 햇빛을 가리게 해주셨어요. 그러자 그러잖아도 더웠던 참이었는데 박넝쿨 덕분에 시원해 졌으니까 요나가 참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랬더니 새벽에는 하나님께서 벌레로 하여금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어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침이 되었더니 뜨거운 햇빛이 내리 쪼입니다. 너무 뜨겁고 더워서 정신이 혼미해 집니다. 너무도 힘들고 괴로우니까 하나님한테 화를 내면서 기도하기를 차라리 죽여달라고 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시다.

요나 4장 10절~11절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主は言われた。「あなたは、自分で労さず、育てもせず、一夜で生えて一夜で滅びたこの唐胡麻を惜しんでいる。
ましてわたしは、この大きな都ニネベを惜しまないでいられるだろうか。そこには、右も左も分からない十二万人以上の人間と、数多くの家畜がいるではないか。」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야, 요나야. 너는 네가 심지도 않고 물도 주지도 않은, 그깟 박넝쿨 하나가 있었다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는데, 니느웨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12만명이나 살고 있어. 그 뿐이 아니라 가축들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들을 내가 아끼는 게 그렇게도 네 마음에 안 든단 말이냐.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래?”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것은 쉽습니다. 다 없애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차라리 그게 더 깔끔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게 어려우시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한순간에 멸망시키셨던 분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노아의 방주 안에 탄 사람들과 짐승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과 땅과 하늘에 사는 모든 짐승들을 한꺼번에 멸망시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있어서 니느웨 같은 도시 한 두 개 없애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회개하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시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요? 물론 니느웨 사람들 자신들을 위해서일 수도 있겠으나, 오늘 본문에 보시면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9장 23절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3.しかもそれが、栄光のためにあらかじめ備えられたあわれみの器に対して、ご自分の豊かな栄光を知らせ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긍휼의 그릇, 그러니까 구원이 약속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그와 같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려고 하셨을까요.

성경에 보시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이제 애굽을 탈출해서 선택 받은 백성이 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3장 9절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あなたは寄留者を虐げ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はエジプトの地で寄留の民であったので、寄留者の心をあなたがた自身がよく知っている。


신명기 10장 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あなたがたは寄留者を愛しなさい。あなたがたもエジプトの地で寄留の民だったからである。

참 은혜로운 말씀 아니십니까. 너, 오갈 데 없는 사람들 무시하지 마. 구박하지 마. 너희들이 애굽에 있을 때를 생각해봐. 사람 취급도 못 받았잖아.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웠어. 그 때를 기억하고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 하물며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했던 사람들,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해서 저주를 바라고 심판을 바라는 대신,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도 역시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셨더라면, 그보다도 훨씬 먼저 우리에게 저주와 심판이 내려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머리 위에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내리시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와 심판을 누구 위에 내리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위에 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심판을,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받아 주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4절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4.このあわれみの器として、神は私たちを、ユダヤ人の中からだけでなく、異邦人の中からも召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구약에서는 이방인에게 믿음이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이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육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면서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는 육적인 유대인에 한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는 영적인 유대인인 우리 자신들도 이제 영적인 이방인을 향해 이 주님의 복음, 주님의 은혜, 그 영광의 풍성한 사랑을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이웃의 저주를 바라는 대신 축복을 바라고, 멸망을 바라는 대신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셔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널려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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