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37회 되돌아 보는 믿음

홍성필 2022. 6. 7.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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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7회 되돌아 보는 믿음
2022년 4월 24 설교 - 로마서 강해 80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7절~18절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18節
“17.聖書はファラオに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18.ですから、神は人をみこころのままにあわれみ、またみこころのままに頑なにさ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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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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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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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0번째 시간으로서 “되돌아 보는 믿음” よく考える信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당시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생활을 겪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3절~14절
“13.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それでエジプト人は、イスラエルの子らに過酷な労働を課し、
漆喰やれんが作りの激しい労働や、畑のあらゆる労働など、彼らに課す過酷なすべての労働で、彼らの生活を苦しいものにした。

참으로 힘든 고난의 세월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시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에서 지내는 모세를 불러 내셔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내라고 하는 크나큰 사명을 주시지요.

이에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에굽 왕 앞에 섭니다.

출애굽기 7장 7절에 의하면 당시 모세의 나이는 여든이고, 형인 아론의 나이는 여든 셋이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두 할아버지에게 이 막중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자, 이제 두 어르신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출애굽기 5장 1절~2절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その後、モーセとアロンはファラオのところに行き、そして言った。「イスラエルの神、主はこう仰せられます。『わたしの民を去らせ、荒野でわたしのために祭りを行えるようにせよ。』」
ファラオは答えた。「主とは何者だ。私がその声を聞いて、イスラエルを去ら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は。私は主を知らない。イスラエルは去らせない。」


애굽 왕 바로를 만나서 하는 말이, 지금 당장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고 말합니다.

앞서 잠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극심한 노예 생활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만, 애굽 입장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노동력입니다. 시민이 아니라 노예이니까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월급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3권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끔찍한 일이지만, 애굽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편리한 도구였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었냐 하면 출애굽기 12장 37절에 의하면 성인 장정만 보더라도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두 할아버지가 와서, 그들을 내보내라고 한다고 해서 애굽 왕 바로가 “아이구 그러세요”하고 순순히 내보내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로 왕을 처음 만나기 전부터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21절 후반부
“21.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しかし、わたしが彼の心を頑なにするので、彼は民を去らせない。

이 말씀은 애굽에서 아직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 정도가 아니라, 아직 모세와 아론이 애굽으로 출발하기 전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왜 굳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려고 하시는 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7절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
“17.聖書はファラオに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출애굽기 9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 16절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しかし、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여기서 “나”는 하나님이시고, “너”는 애굽 왕 바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를 애굽 왕으로 앉힌 이유는, 네가 이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애굽 왕에게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순순히 내보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두 할아버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애굽 왕은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출애굽기 5장 4절 이후에 보면, 일을 하는 조건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당시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벽돌을 사용했는데, 수많은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 벽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벽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흙에다가 지푸라기를 섞어서 굳힌 것을 사용했는데, 그 때까지는 애굽 사람들이 지푸라기를 모아다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면, 그들이 그걸 가지고 벽돌을 만들고 있었는데, 모세의 말에 화가 난 바로 왕은, 야, 이제부터 지푸라기를 가져오는 일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시켜. 하지만 만들어내는 벽돌 수는 줄이지 말고 똑같이 해야 돼.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아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푸라기를 모아오게 되면 그만큼 벽돌을 만드는 일손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돌 수를 똑같이 맞추라고 하면 이는 상당히 곤란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수를 못 맞추니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때립니다.

이처럼 고난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미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노가 누구를 향하게 되겠습니까. 바로 모세와 아론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장 21절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彼らは二人に言った。「主があなたがたを見て、さばかれますように。あなたがたは、ファラオとその家臣たちの目に私たちを嫌わせ、私たちを殺すため、彼らの手に剣を渡してしまったのです。」

야, 그냥 이렇게 살게 내버려둬. 아니, 지금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엉뚱한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드느냐, 하고 모세한테 따지는 것이지요.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지금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나요. 아니요. 따랐습니다.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있어서는 애굽이 적군이라고 한다면,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군이잖아요. 그런데 애굽 왕이 모세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도 싫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의 걸음, 순종의 걸음을 멈추면 안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있어서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주여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자, 우선 단순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칩니다. 정말 참고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에요. 그럴 때 “주여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한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소불위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기도인 것이지요.


물론 그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전부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왕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게 되지요.

이 때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기도를 한다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를 빨리 애굽에서 내보내달라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보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번째, 두번째 재앙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번째, 네번째…… 이렇게 재앙은 계속되지만 애굽 왕 바로는 여전히 완고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해왔었다면 이제 서서히 지쳐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기도를 했다고 해봐요. 다섯 번째, 여섯 번째까지도 “믿습니다…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를 내보내 주지 않습니다. 이제 여기 쯤 되면 기도하던 사람들 중에서는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요.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이, 기도를 해 봤자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나 보다. 그래서 포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기에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첫째는, 대단히 인내심이 강한 분이시죠.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렇게 해서 끝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두 번째 사람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저 밤이나 낮이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 기도는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소망을 갖는 것이 기도 아니겠습니까.


전도서 7장 14절을 봅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지요. 하지만 이 기쁨은 단순히 그냥 아이고 좋아라 하는 것만이 아니라, 형통케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 기뻐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참 심오합니다. 곤고한 날, 고난이 닥칠 때에는 금식하고 철야하라……가 아니라 “되돌아보아라”라고 되어 있어요. 개역한글에는 이 부분이 “생각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두 번째 사람은 바로 “되돌아보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되돌아보아야 할까요. 물론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회개할 일, 하나님이나 이웃에 대해서 회개할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서어서 회개하고 화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내가 무슨 이와 같은 고난을 겪을 만한 죄를 지은 것 같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을 허락 하셨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주여! 믿습니다!”하면서 힘들게 흔들었던 두 손을 잠시 내려놓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잠시 생가해보자는 것이지요.

우리 한 번 운전을 하는 데에 있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텔레비전 같은 곳에서 보면 광활한 벌판에, 커브도 없이 일직선으로 쫙 뻗은 도로를 보면, 와, 정말 한 번 달려보고 싶다……이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길을 조금 달리면 정말 참 지루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 미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랜드캐년을 버스로 가 봤었거든요. 정말 참 지루하더라고요. 아무리 달려도 바깥 풍경이 바뀌질 않아요. 앞에 보면 정말 일직선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주위에는 허허벌판이에요. 그나마 커브를 하고 그러면 풍경이 바뀌기라도 하겠는데, 그냥 일직선으로 가기만 하니까 그나마도 안 바뀝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무슨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아무리 달려도 그 자리에서 안 움직여요.

미국 특히 서부에 보면 이런 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있는 자동차에 보면 특이한 기능이 있어요. 아마도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고급 차는 이런 기능이 있는 자동차들이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직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그런 차를 타본 적이 없는데, 미국에 보면 웬만한 차들에는 다 있는 기능이 뭐냐 하면, 자동차가 달리다가 속도를 고정해주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100킬로로 달리고 있으면서 거기에 딱 맞춰서 고정을 시켜놓으면, 내가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어놓아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이상 그 고정시켜 놓은 속도로 계속 달리게 됩니다.


이 기능이 정말 그런 일직선 도로를 달릴 때에는 꽤 편하거든요. 왜냐하면 계속 똑 같은 힘으로 발에 힘을 추게 되면, 자칫하면 쥐가 나기도 합니다. 다리가 막 뻐근해 집니다. 그래서 어차피 앞에 차도 안 보이고, 길은 일직선이고 하면, 딱 고정을 시켜 놓습니다. 그러면 발도 편하고, 그리고 또 지나치게 밟아서 과속을 할 위험도 없지요.

그런데 이제 발도 뗀 채로 운전을 하다 보면 정말 할 것이 없거든요. 커브도 없으니까 핸들도 별로 움직일 필요가 없어요. 그럴 때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졸음 운전인 것이지요.


차가 막히지도 않아요. 신호등도 없어요. 오른쪽 왼쪽으로 꺾어지지도 않아요. 사실 이렇게 보면 운전하기에 제일 좋은 조건처럼 보입니다만, 이럴 때 졸음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만에 하나 깜빡 조는 바람에 도로에서 벗어났다고 쳐요. 그래도 그런 도로에서는 뭐 주위에는 건물도 없으니까 빨리 멈추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면 자동차는 속도가 줄어 들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나마 대형사고는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도를 고정시켜 놓았다고 생각해보세요.

100킬로로 고정을 시켜 놓았다면 졸음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100킬로로 달립니다. 그러다가 길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면, 도로가 아닌 곳을 100킬로로 달리게 돼요. 그러면 차가 온전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99%도 아니에요. 100% 목숨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도 운전을 하면서, 특히 피곤한 상태에서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면 졸음이 막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잠시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눈을 붙이는 게 최고지요.

하지만 잠을 자지도 않았는데 잠이 깰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던 경험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떤 때였냐 하면, 자동차 기름 부족 램프가 켜졌을 때에요. 당장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주유소가 안 보여요. 그렇게 되면 정말 졸렸던 눈이 빤짝빤짝 해집니다.

한국이나 일본은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까 말씀드린 그런 광활한 길을 달리다가 한복판에서 서게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정말 답이 없거든요. 더구나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좀 무섭습니까. 특히나 제 경우에는 그 때가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이 정말 확 깨더라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자동차 상태가 심상치 않았을 때입니다. 제가 예전에 비자 문제가 좀 꼬여서, 한 번은 동경에 있는 입관에까지 갔던 적이 있거든요.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아침 일찍 출발합니다. 아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4시쯤에 출발했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피곤 했겠어요. 그래서 동경에 도착해서 입관 쪽으로 가는데 정말 참 졸리더라고요.

그런데 아이고. 자동차에 이상이 생겼어요. 가속페달을 밟아도 차가 제대로 가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제가 옛날에 살았던 동네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뭐 어디가 어딘지 조차 모르죠. 그런데 동경 한복판에서 차가 멈출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잠이 달아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 말씀을 다시 보실까요.


로마서 9장 17절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
“17.聖書はファラオに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완고한 사람 때문에, 어떤 고약한 사람 때문에 앞길이 막힌 적 없으십니까. 참고로 저는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또는 뜻하지 않은 곤고한 일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하는 것, 물론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내 주시고 환난 가운데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사람을 완악하게 하거나, 또는 곤고함을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채 그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전혀 의롭지도 않은 우리, 정말 죄악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죄악 속에서 멸망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 우주 천하 만물 중에서 예수님의 피 한 방울만큼 값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피 한 방울입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 모두를 십자가 위에 쏟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의 값어치는 얼마라는 뜻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값어치는 예수님의 피와 같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만큼 잘났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첫째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흘리게 하시면서까지 구원하기를 원하셨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을 다시 보실까요.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가끔 미래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 점을 본다고 하는데, 아니, 성경에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 장래 일을 할지 못하게 하셨다잖아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가령 지금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에요.

다 알 것 같지요? 하지만 제가 항상 말씀 드리지요? 우리는 차를 타고 달리다가 5분 뒤에 빨간 신호에 걸릴지 안 걸릴지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주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놀라운 축복으로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셨습니까. 고통과 고난 중에 있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름 램프가 켜졌습니까. 가속 페달을 밟아도 앞으로 안 갑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통이고 고난이고 위기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일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도 앞서 말씀 드렸던 경험을 되돌아볼까요?

장거리를 달리고 있는데 기름 램프가 켜졌을 때 잠이 확 깼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으나 덕분에 졸음운전을 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무사히 주유소를 찾아서 기름을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동경 한복판에서 가속 페달에 이상이 있었을 때에도 역시 이거 어쩌면 좋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덕분에 졸음운전을 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무사히 사랑하는 군마현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때로는 우리를 졸음에서 깨우시고, 올바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가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중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8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18節
“18.ですから、神は人をみこころのままにあわれみ、またみこころのままに頑なにされるのです。”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이랬더가 저랬다가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갖는 삶을 통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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