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36회 부활과 용서

홍성필 2022. 6. 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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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6회 부활과 용서
2022년 4월 17일 설교부활절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マタイの福音書 6章12節
“私たちの負い目をお赦しください。私たちも、私たちに負い目のある人たちを赦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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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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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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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과 용서” よみがえりと赦し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는 대단히 슬퍼해야 할 일, 비극적인 사건이어야 할 것입니다만,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예언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 없이 예수님이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고 해도,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인지, 아니면 원래는 더 하실 일들이 남아 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체포되신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래는 하셨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그걸 다 못 이루고 십자가에 달려 버리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대요? 예, 자기가 왔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일들을 마저 하라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한참 전부터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고 또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성경을 보면 구약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서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垂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해서 모두 다 받아 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 율법을 어긴 죽음이라고 하는 형벌을 대신해서 모두 다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감당 하셔야 할 일을 모두 완전히 이루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인가요? 아닙니다. 아직 끝이 아니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히브리서 10장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은 신약에 있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예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제사를 어떻게 드렸습니까.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양이나 염소 같은 제물을 드렸지요. 먼저 그 제물을 죽이고 장작 위에 올려 놓고는 불로 태움으로 해서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전한 제사가 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무엇이 완전한 제사이냐 하면,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는, 십자가라고 하는 장작 위에서 죽으시는 것이, 바로 완전한 제사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시면 율법적인 제사에서는 제사장이 불을 붙여서 제물을 태웁니다만,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 사사기 6장에서의 기드온이 드린 제사, 사사기 13장에서 삼손의 아버지가 드린 제사, 역대하 7장에서의 솔로몬이 드린 제사 등을 보시면, 사람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제물을 태웠다고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만, 이것으로는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난다고 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하면, 바로 용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아무리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모두 당하셨다 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한다면, 이는 여전히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럼 이 부활은 무엇입니까.

무슨 예수님이 무덤에 누이신 다음에 사흘이 지났을 때쯤 해서, 아, 이제 서서히 좀 일어나 볼까? 해서 일어난 것이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0절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神はこの方を三日目によみがえらせ、現れ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

베드로전서 1장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ご自分の大きなあわれみのゆえに、イエス・キリストが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ことによって、私たちを新しく生まれさせ、生ける望みを持たせてください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성경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용서를 해도 하나님이 용서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마치 그런 식이지요. 고속도로에 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고속도로에 들어갈 때 보면 어떻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막대기가 내려와 있잖아요. 그런 상태로는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ETC 같은 자동 납부시스템이든 아니면 사람한테 직접 돈을 냈든, 아무튼 해야 될 것은 다 했어요. 그런데 문이 안 열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냈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에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이 부활이야말로 용서의 증거이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천국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 기쁘고 감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マタイの福音書 6章12節
“私たちの負い目をお赦しください。私たちも、私たちに負い目のある人たちを赦します。”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와 유사한 말씀은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 11장 4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私たちの罪をお赦しください。私たちも私たちに負い目のある者をみな赦します。私たちを試みにあわせないでください。』」

이 두 구절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어느 쪽이 먼저에요?

예, 이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주는 것이 먼저이고, 그렇게 우리가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자,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이렇게 용서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제가 이렇게 용서한 것처럼 우리를 이렇게 용서해주세요……이렇게 기도를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뭐예요? 예,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라……라는 말씀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을 대표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아이, 저 하나님. 그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 없고요. 그냥 우리 교회 잘 다니고, 예수님 잘 믿으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어렵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걸 믿을 게요. 그러니까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해주세요…….

솔직히 우리가 드리고 싶은 기도가 이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말씀을 누가 하셨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누구한테 하셨을까요. 믿지 않는 사람한테요? 아니요.

마태복음에서는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멀리서부터 몰려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용서가 쉽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죄’라고 하는 단어가 원문에 보면 ‘부채’ 즉 갚아야 하는 ‘빚’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직역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용서하여 주시옵고”

라는 식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을 용서해줍니까. 빚을 갚은 사람을 용서해 주나요? 아니요.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으면 그건 용서가 아니라, 단순히 계약을 이행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계약은 완료됩니다. 용서고 뭐고 없어요.


그렇다면 어떨 때에 용서가 필요하냐 하면 바로 빚을 갚지 못했을 때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35절에 보시면 왕과 신하와 신하의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간관계상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씀드릴게요. 신하는 왕한테 지금 화폐가치로 6조원(6천억엔) 의 빚을 지었습니다. 왕이 이 돈을 다 갚으라고 해요. 그러니까 신하가 용서해달라고 간절하게 구합니다. 그러자 왕은 이 6조원(6천억엔)이나 되는 돈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이제 이 신하는 돈을 안 갚아도 돼요.

그런데 이 신하는 자기 친구에게 지금 돈으로 천만원(100만엔)을 꾸어 주었는데,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러자 멱살을 잡고 말합니다. 야, 내 천만원 당장 갚아라. 그러니까 그의 친구가 말합니다. 정말 미안하다. 꼭 갚을 테니까 용서해달라.

하지만 그래도 이 신하는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에요. 이 상황을 다른 동료들이 보고는 왕에게 사실을 다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왕이 어떻게 했겠어요.


왕은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아니, 나는 그 놈이 불쌍해서 6조원(6천억엔)이나 되는 빚을 탕감해주었는데, 그 놈은 천만원(100만엔)도 탕감해주지 못한단 말이냐. 당장 그 놈을 잡아와서 6조원(6천억엔)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버려라. 이렇게 명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천만원(100만엔)이 작은 돈입니까. 뭐, 부자한테는 작은 돈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6조원(6천억엔)은 우리가 도저히 평생 동안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이라는 점과, 천만원(100만엔)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모을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왕은 왜 이 신하에게 화가 났습니까. 단순히 돈 천만원(100만엔)을 탕감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났나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자기가 한 푼도 안 쓰고 평생 동안 벌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 그보다도 훨씬 적은 돈, 사실 6조원(6천억엔)에 비하면 천만원(100만엔)은 60만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 탕감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요, 또 하나는 내 이웃이 나한테 지은 죄입니다.

자,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와 내 이웃이 나한테 지은 죄. 어느 쪽이 클까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 그러시겠어요. 에이, 이웃이 나한테 무슨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다르죠. 그러실 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예외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네 이웃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네가 하나님한테 지은 죄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죄이다. 그러니까 네 이웃이 지은 죄를 용서해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그것을 용서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리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냥 분위기상 ‘아멘’ 한 마디로 용서를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저 자신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잘 알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8장 8절~9절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あなたの手か足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それを切って捨てなさい。片手片足でいのちに入るほうが、両手両足そろったままで永遠の火に投げ込まれるよりよいのです。
また、もしあなたの目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それをえぐり出して捨てなさい。片目でいのちに入るほうが、両目そろったままゲヘナの火に投げ込まれるよりよいのです。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랫동안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라고 하는 말씀을 여기에 적용시켜보니까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용서가 왜 어렵습니까. 참 억울한 일이거든요. 내가 받을 것을 다 받아야 용서를 하든 말든 하지, 아무것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무엇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미움이 생기고 복수심이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내 팔이나 발을 찍어 버리는 것과도 같은 아픔, 더 심하게는 내 한쪽 눈을 빼버리는 것만 같은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다 받아 내고, 네 자존심 세울 것 다 세운 채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억울하고 자존심 상한 채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니?

그 이유가 뭐예요? 그래. 네가 당한 억울함,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그냥 용서해주라는 것 아니야. 네가 네 힘으로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너는 이미 용서 받았어.

그러니까 차라리 자존심 좀 내려놓고, 그냥 용서해줘라. 지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다윗 왕에 이어 이스라엘 3대 왕이 된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열왕기상 3장 7절~9절에 보시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왕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바로 재판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백성들에 대해서 제대로 재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해요.

그랬더니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딱 한 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0절
“10.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これは主のみこころにかなった。ソロモンがこのことを願ったからである。

그래서 이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3장 11절~13절
“11.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神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願い、自分のために長寿を願わず、自分のために富を願わず、あなたの敵のいのちさえ願わず、むしろ、自分のために正しい訴えを聞き分ける判断力を願ったので、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と判断の心を与える。あなたより前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く、あなたの後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起こらない。
そのうえ、あなたが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も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が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一人もいな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무나도 감동을 하십니다.

그래, 참 그 기도 정말 마음에 든다. 알았어. 네가 구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도 주고, 그리고 네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까지도 덤으로 다 주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정말 그가 얻은 지혜는 물론이요, 어마어마한 부귀와 영광까지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왕은 본래 좀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솔로몬이 아직 왕이 되기 전, 그의 아버지 다윗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장 9절 중반부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あなたは知恵の人だから、 ……

이 기록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미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 마저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잘난 사람입니까.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인가요?

교회에서 본다면 자기가 제일 믿음이 좋은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요. 그렇죠.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아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어 왔는지를 알아요.
그리고 무엇을 알아요.
그렇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무거운 죄를 용서 받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간절하게 말씀을 의지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도 되고 안 해도 되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 어려운, 그야말로 내 몸을 찍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는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22절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そのとき、ペテロがみもとに来て言った。「主よ。兄弟が私に対して罪を犯した場合、何回赦すべきでしょうか。七回まででしょうか。」
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は七回までとは言いません。七回を七十倍するまでです。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에이, 예수님, 말은 쉽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이봐, 그래. 알아. 알지.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온갖 수치를 무릅쓰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보다 어렵겠니?”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용서하기 전에는 우리 주변은 모두 죽은 영혼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은 이웃은 우리 이웃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하게 된다면, 그 죽은 영혼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진정한 우리 이웃, 우리 형제자매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구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던 것처럼, 용서 또한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도 용서가 안 돼요? 그러면 그 용서의 마음을 하나님께 구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도저히 그 인간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천국에 가야 되겠으니,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가 용서하는 마음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これは主のみこころにかなっ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願ったからである。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부어주신 축복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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