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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38회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

by 홍성필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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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8회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
2022년 5월 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1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9절~21절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9節~21節
“19.すると、あなたは私にこう言う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神はなおも人を責められるのですか。だれが神の意図に逆らえるのですか。」
20.人よ。神に言い返すあなたは、いったい何者ですか。造られた者が造った者に「どうして私をこのように造ったのか」と言えるでしょうか。
21.陶器師は同じ土のかたまりから、あるものは尊いことに用いる器に、別のものは普通の器に作る権利を持っていないの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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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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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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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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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1번째 시간으로서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 尊く造られた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조금 어려운 내용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내용을 복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은 출애굽기에 대한 내용이었지요?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이 애굽 왕 바로한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당장 내보내라고 말하지만, 바로 왕은 끝까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지난 주에 공부하기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18절로 마무리를 하지요. 18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8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ですから、神は人をみこころのままにあわれみ、またみこころのままに頑なにされるのです。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뿐 아니라 완악하게 하실 자도 완악하게 만드시는 경우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요. 그것이 바로 19절입니다.

로마서 9장 19절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19.すると、あなたは私にこう言う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神はなおも人を責められるのですか。だれが神の意図に逆らえるのですか。」

이 말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음? 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히 보내셔서 애굽 왕 앞에 세우시고, 그리고 왕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면, 바로 왕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우리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더러 죄를 짓게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를 죄인 취급하신다? 이건 좀 너무 하잖아? 라고 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자칫 운명론이라고 하는 어설픈 함정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을 바꿀 수가 없어. 그저 하나님의 꼭두각시에 불과해 ……. 뭐, 이렇게 어설픈 주장을, 꽤나 대단한 철학이나 사상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그러니까 완악하게 된 애굽 왕에 대한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생각해 볼 점은 바로 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게 하신 바로를 전도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하시기를 원하셨고, 그 목적을 위해서 바로 왕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죄를 짓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순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 바로에게 있어서는 순종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셨던 모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을 뿐이지만, 그는 그렇다고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심각한 죄를 범하도록 하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죄를 짓게 하셨다는 일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더러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우리더러 죄를 짓게 만들어놓고는 왜 우리를 탓하느냐 하는 주장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어설픈 주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리고 다음 구절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내용을 언급합니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에 대한 내용이 종종 나옵니다.

예레미야 18장 3절~4절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私が陶器師の家に下って行くと、見よ、彼はろくろで仕事をしているところだった。
陶器師が粘土で制作中の器は、彼の手で壊されたが、それは再び、陶器師自身の気に入るほかの器に作り替えられた。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보면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녹로라고도 하고 돌림대라고도 하는 것 위에 진흙을 올려놓고는 돌려가면서 그릇을 만드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릇을 만들고 있는데, 진흙이 사람더러 나를 이렇게 만들어라 저렇게 만들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만들 그릇의 크기나 모양, 그리고 어디에 쓸 그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롭지요?


20절~21절입니다.

로마서 9장 20절~21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0.人よ。神に言い返すあなたは、いったい何者ですか。造られた者が造った者に「どうして私をこのように造ったのか」と言えるでしょうか。
21.陶器師は同じ土のかたまりから、あるものは尊いことに用いる器に、別のものは普通の器に作る権利を持っていないのでしょうか。

이 말씀을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오해하실 수가 있냐 하면요. 이봐, 매사에 불평 불만을 말하지 마. 너를 귀한 그릇으로 만드시든 천한 그릇으로 만드시든,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일이니까 잘났건 못났건, 넉넉하든 부족하든, 그냥 너 생긴 대로, 네 팔자 대로 살아.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서, 이 또한 그야말로 어설픈 운명론처럼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것과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명하니 한 평생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침노한다는 것은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기울여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하여 순종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그냥 네가 귀한 그릇이든 천한 그릇이든 불평하지 말고 네 팔자 대로 살아라……가 아니라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푸는 힌트는 디모데후서에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ですから、だれでもこれらのことから離れて自分自身をきよめるなら、その人は尊いことに用いられる器となります。すなわち、聖なるものとされ、主人にとって役に立つもの、あらゆる良い働きに備えられたものとなるのです。

오늘 본문에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 이렇게만 나왔는데 디모데후서에는 여러 가지 그릇의 비교가 나옵니다.

먼저 금 그릇과 은 그릇,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나오지요. 그리고 역시 오늘 본문처럼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는 바로 육의 눈과 영의 눈으로 분류를 해보면 금발 알 수 있습니다.

금 그릇이냐, 은 그릇이냐. 나무 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은, 육의 눈으로 본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그릇을 만든 주인이 그 그릇들을 무슨 용도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새로 컴퓨터를 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양을 보면 그 컴퓨터가 얼마나 가격이 나가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컴퓨터를 산 사람이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요. 정말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구입했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비싼 컴퓨터를 사 놓고는 밥상으로만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컴퓨터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까.


그릇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이라 하더라도 막상 그 주인이 그 그릇을 어디에 쓸 것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안 쓰고 창고에 넣어두고서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전혀 가치가 없는 그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만들었든지 불평불만하지 말고 그냥 입다물고 생긴 대로 살아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우리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지불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만큼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렇게나 만드셨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기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큰 부품도 있고 작은 부품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큰 부품은 귀하고 작은 부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가요?


그렇지가 않지요. 아무리 큰 부품들이 멀쩡하다고 해도 작은 나사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로 인해서 기계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아, 정말 내가 부모 잘 만나서 부자였다면 정말 멋진 인생 한 번 살아보는 건데, 작은 나라가 아니라 미국이나 그런 큰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시골이 아니라 대도시에서 자랐더라면,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또는 반대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태어났었더라면 정말 멋지게 한 번 살아보는 건데……이런 생각 아마도 많은 분들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뭐, 상상이야 자유이니까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생각을 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허탈해 지고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 잘못 만나서, 내가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내가 돈이 없어서……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평불만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한테 따지지 말라고 그래요.

아……그러면 그나마 성경을 읽으려다가도 소망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만드시고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빛을 만드시고도,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도, 채소와 나무들을 만드시고도, 태양과 달을 만드시고도, 짐승들을 만드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神は良しと見られた)”라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는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보시기에 좋았더라(神は光を良しと見られた)”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에이, 괜히 만들었다”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위해서, 땅과 바다나 나무들과 짐승들을 위해서, 하물며 태양이나 달을 위해서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우주 천하 만물보다도 귀한 예수님의 피를,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모두 흘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보았을 때, 그릇으로 본다면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가 않아요? 싸구려 형편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나요?

아,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참 값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나요? 남들은 참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가 있으신가요?

자, 우리 앞에 어떤 그림이 있습니다. 화려한 색을 겹겹이 칠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연필로 쓱쓱 그린 그림입니다. 크기도 별로 크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 그림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그림 구석에 조그맣게 적힌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작은 글씨로 “피카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크게 뛰겠습니까.

이사야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64장 8절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しかし、今、主よ、あなたは私たちの父です。私たちは粘土で、あなたは私たちの陶器師です。私たちはみな、あなたの御手のわざです。

이 본문에 의하면 토기장이는 주님이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가치가 없어 보이십니까. 남들은 귀한 그릇처럼 보이고 나는 천한 그릇처럼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른바 명품 브랜드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익히 아는 아주 비싼 물건들을 만드는 곳에서 천한 상품을 만들겠습니까. 아닙니다. 고급 상품만 만듭니다. 저 같은 비전문가가 보면 저걸 어디에 쓰라고 만들어 놓은 거야? 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명품 브랜드가 만든 이상, 천한 데 쓰라고 만들어 놓은 것은 없어요. 다 고급 용도로 쓰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 아무리 값비싼 명품 브랜드다 하더라도 하나님, 예수님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명품 물건들도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만큼 가치가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천한 그릇으로 만드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천한 그릇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뿌려진 예수님의 피를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항상 말씀 드리지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다면, 그것은 바로 나만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서도 쏟으신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귀한 그릇으로 쓰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하여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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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www.kirin.kr
이카호중앙교회 ikaho.kir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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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이야기 www.iyag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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