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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01회 축복의 무게

by 홍 성필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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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회 축복의 무게
2021년 8월 22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18절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7節~18節
“17.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に心から服従し、
18.罪から解放されて、義の奴隷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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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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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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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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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7번째 시간으로서 “축복의 무게” 祝福の重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18절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7.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に心から服従し、
18.罪から解放されて、義の奴隷となりました。”

바울은 지금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하면 자신이 전해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죄로부터 해방되어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그것만으로도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임하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 누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많이 배워서, 우리가 열심히 연구를 한 결과 예수님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규모가 큰 대학이나 회사에 보면 1년에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을 수 백명 수 천명을 뽑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니까 그냥 대충, 뽑아요? 올해는 수험번호 짝수만 뽑을까? 아니면 홀수만 뽑을까? 그렇게 뽑습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대충 뽑는다면 그 학교나 회사는 금방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뽑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모두 알고 난 다음에, 정확하게 그 사람을 꼭 집어서 뽑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냥 대충 부르시거나 대충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정확히 아시고,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신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꼭 집어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놀랍고 놀라운 감사를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맙니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이 나옵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그의 아들은 쌍둥이였는데 큰 아들 이름은 에서이고, 작은 아들은 야곱이었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장남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히려 옛날에 비한다면 권리보다 의무가 더 늘어난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나 일본을 보아도 과거에는 장남에 대한 권한이 대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장남에게는 그 집의 상속권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자녀에 대해서도 상속권은 있었습니다만,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장남이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 같은 경우를 본다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간혹 예외도 있었습니다만, 어느 나라나 대부분 장남이 그 왕위를 잇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의 동생은 2인자가 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왕위에 오른 형과 그렇지 못한 동생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군신의 관계, 즉 왕과 신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장남으로 태어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요즘은 법적으로나 의학적인 방법으로 남녀 성별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만,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별을 바꿀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형제의 순서인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안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열성적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얻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족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 자신이 꾀를 부려서 장자의 명분을 에서로부터 빼앗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34절에 보시면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34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この子どもたちは成長した。エサウは巧みな狩人、野の人であったが、ヤコブは穏やかな人で、天幕に住んでいた。
イサクはエサウを愛していた。猟の獲物を好んでいたからである。しかし、リベカはヤコブを愛していた。
さて、ヤコブが煮物を煮ていると、エサウが野から帰って来た。彼は疲れきっていた。
エサウはヤコブに言った。「どうか、その赤いのを、そこの赤い物を食べさせてくれ。疲れきっているのだ。」それで、彼の名はエドムと呼ばれた。
するとヤコブは、「今すぐ私に、あなたの長子の権利を売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エサウは、「見てくれ。私は死にそうだ。長子の権利など、私にとって何になろう」と言った。
ヤコブが「今すぐ、私に誓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で、エサウはヤコブに誓った。こうして彼は、自分の長子の権利をヤコブに売った。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사냥을 좋아했던 형 에서가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피로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야곱은 그 길목에서 일부러 죽을 쑤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정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배가 고팠던 기억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이었으니까, 재작년 쯤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때는 그 동안 게을리하던 운동을 좀 다시 해볼까 해서,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자전거 도로를 달렸을 때였는데, 오랜만에 하니까, 그 정도로 운동을 하면 체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 밥을 먹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겠지 하고 나가서 달렸는데, 한 40분쯤 달렸을 때였을까요. 거기서 이제 돌아오는 지점인데, 갑자기 허기가 집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있을 수가 없어요. 앉을 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붙잡고 가만히 이렇게 웅크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만 도무지 안 되겠어요. 그래서 폰으로 황급히 편의점을 찾는데, 그럴 때 일수록 멀리 있는 것이 바로 편의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평소라면 자전거로 불과 5분도 안 걸릴 정도의 거리일 텐데, 그 때는 정말로 천리 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몇 날 며칠 동안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황급히 들어가서 빵 2개와 딸기우유 하나를 사서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시 에서의 기분을 알 것도 같습니다. 허기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마침 어딘가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솔솔 납니다. 그래서 다가가보았더니 자기 동생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은 기다린 것이겠습니다만, 아무튼 딱 거기서 팥죽을 쑤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에서는 동생한테 당장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동생 야곱이 묘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 25장 31절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するとヤコブは、「今すぐ私に、あなたの長子の権利を売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이 때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갖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허를 찌르는 요구였는지도 몰라요.


에서는 말합니다.

바로 밑에 32절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エサウは、「見てくれ。私は死にそうだ。長子の権利など、私にとって何になろう」と言った。

이렇게 해서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을까요. 사실 이 내용을 보면 여기서의 핵심 인물이 야곱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세히 보시면 이 대목에서 성경이 주목하고 있는 인물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대목에서 야곱이 중심인물이었다면 마지막 부분인 34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음이더라”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ヤコブは長子の権利を得ることができた。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 보면 34절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자녀가 있는데 두 형제라고 해요. 꼭 쌍둥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그런데 어느 날 두 형제가 여러분께 와서 말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늘부터 우리가 형제를 서로 바꾸기로 했어요. 그래서 형인 제가 내일부터는 동생이 되고, 동생인 쟤가 내일부터는 형이 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알았다……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놈의 자식들이 무슨 헛소리야! 하고 혼을 내지 않겠습니까.

당시는 더욱 심했겠지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장남이 가진 역할이 중요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끼리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큰 꾸짖음을 당하고도 남을 일이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만에 하나, 부모가 허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형제 순서가 바뀔 수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야곱이 형이 되고 에서가 동생이 되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성경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해심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점이 아니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축복의 무게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을 해서 어렵게 어렵게 장자의 명분을 따냈던 것이라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돈을 낸 것도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은혜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이 야곱에 주목을 했었다면 “야곱이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것처럼 너희들도 야곱을 본받아서 축복을 빼앗아야 하느니라” 뭐, 이렇게 기록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와 같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또 음란한 사람이나 한 그릇의 음식 때문에 맏아들의 특권을 팔아 버린 에서와 같은 불신앙의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また、だれも、一杯の食物と引き替えに自分の長子の権利を売ったエサウのように、淫らな者、俗悪な者にな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을 성경은 바로 망령된 자,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무게를 몰랐기 때문에,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그야말로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맞바꿀 수 없는 ‘장자권’이라는 크고 놀라운 축복을, 팥죽 한 그릇, 제가 허기가 졌을 때 편의점에서 사 먹은 빵 2개와 딸기우유 하나 정도에 팔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서가 그 하나님의 축복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요. 팥죽이 아니라 당장 그 자리에 쓰러져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기지 않았겠지요. 끝까지 자신이 받은 축복을 지켰을 것입니다.

‘망령된 자’, ‘불신앙의 사람’와 같이 축복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또한 ‘감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크나큰 축복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 은혜에 감사를 드렸겠지만, 그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있어서는, 감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믿음도 좋습니다. 소망도 좋습니다. 사랑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감사가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이 사람의 표정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교회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소망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사랑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자, 이와 같은 사람의 표정이 어떨까요.

교회에 맨날 다니는데 감사가 없어요.
아휴, 헌금 내랴 십일조 내랴, 왜 이렇게 돈은 많이 내래.
아휴, 성경은 좀 쉽게 써 놓지, 왜 이렇게 어렵게 써 놔서 못 알아먹게 만들어?
아휴, 누구누구는 정말 꼴도 보기도 싫은데 왜 교회는 안 빠지고 부지런히 나오는지 모르겠어.
아휴, 주일학교 애들은 왜 저렇게 시끄럽게 난리를 치고 그래.

소망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소망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기도 응답도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알기 쉽게 차를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휴, 차가 필요하다고 기도하니까 경차를 주시는 것 봐. 좀 남들처럼 좋은 차를 주시면 안 되나?
아휴, 차가 필요하다고 기도하니까 국산 차를 주시는 것 봐. 좀 남들처럼 외제차를 주시면 안 되나?
아휴, 외제차를 달라고 했더니만 한 대 밖에 안 주시는 것 봐. 우리 가족이 나 하나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랑은 질투와 시기가 생기게 됩니다. 의심이 생깁니다.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감사가 없으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됩니다. 자기 멋대로 대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를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의 표정은 어떨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표정은 뻔합니다. 거기에는 감사가 없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맨날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를 않아요.

그렇게 되면 낮이나 밤이나, 나가나 들어오나 항상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건 뭐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겠습니까? 맨날 찡그린 얼굴을 하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하이고, 나도 당신처럼 예수 믿으면서 찡그리고 다니라고? 됐네 이 사람아. 그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감사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무게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고픔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축복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배가 고프십니까. 어려우십니까. 그러시겠지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지금 코로나다 뭐다 해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차버리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금 팥죽 한 그릇을 못 먹은 정도로, 빵이나 우유를 못 먹은 정도로 쓰러져 죽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으로 우리는 값없이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무게를 모르고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는 에서보다도 못한 사람, 크나큰 축복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13절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不法がはびこるので、多くの人の愛が冷えます。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어려움이 더할수록 많은 사람들의 믿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데 예수님은 믿어서 뭘 해.”

이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버리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 그 너머에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그리고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무게를 깨닫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붙잡고 끝까지 견디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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