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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99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by 홍 성필 202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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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2021년 8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2節~14節
“12.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13.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14.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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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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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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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5번째 시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私たち自身を神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누가복음 말씀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20절~26절 말씀입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20절~26절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さて、機会を狙っていた彼らは、義人を装った回し者を遣わした。イエスのことばじりをとらえて、総督の支配と権威に引き渡すためであった。
彼らはイエスにこう質問した。「先生。私たちは、あなたがお話しになること、お教えになることが正しく、またあなたが人を分け隔てせず、真理に基づいて神の道を教えておられ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
ところで、私たちがカエサルに税金を納めることは、律法にかなっているでしょうか、いな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らの悪巧みを見抜いて言われた。
「デナリ銀貨をわたしに見せなさい。だれの肖像と銘がありますか。」彼らは、「カエサルのです」と言った。
すると、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では、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返しなさい。」
彼らは、民の前でイエスのことばじりをとらえることができず、答えに驚嘆して黙ってしまった。

이 부분 중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라는 말씀은 많은 분들께도 친숙한 구절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의 참뜻을 아시는 분들은 비교적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장면, 우리가 성경에 적혀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읽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장면은 상당히 긴장감이 감도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20장 20절에서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機会を狙っていた彼らは)”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 구절인 19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律法学者たちと祭司長たち)을 가리킵니다.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 지도층 인사, 즉 기득권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연한 말이겠습니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백성들에게는 은혜도 베풀고, 천국복음을 전하기도 하시고, 병을 치료하기도 하시고,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반면에 사회 지도층 인사였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꾸짖으시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서기관이나 대제사장들이 보기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을 비판해요. 이렇게 되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게 됩니다. 자기들을 존경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명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제거해야겠지요. 그래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여러 번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4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중에서, 공통된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하는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요약하면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보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그 질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아니, 세금은 당연히 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로마의 식민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가이사’는 시저 즉 로마 황제를 뜻합니다.

이 장면은 과거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대단히 알기 쉽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지요. 당시에는 일본에 반항하는 것은 범죄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요.

자, 그렇다면 조선의 어느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의 지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기 있던 어떤 조선인 유명인사한테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일본의 천황폐하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만약에 일본 천황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대답을 했다면, 당시 조선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당대 유명인사였다면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외쳐도 모자랄 판에 일본 천황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친일파 아냐? 매국노잖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일본 천황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였습니다. 어쩌면 일본 경찰들도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본에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했다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면 예수님은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에 대해서 반역을 한 혐의로 붙잡혀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예수님을 고립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은,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대답을 해도 예수님께 해가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곤경에 빠지게 되는, 말하자면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계산된, 대단히 악의적인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큰일났습니다. A가 옳으냐 B가 옳으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A가 옳다고 해도, B가 옳다고 대답을 해도 결국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의도를 예수님께서 모르셨을까요?

23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20장 23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イエスは彼らの悪巧みを見抜いて言われた。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악한 계책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통용되고 있는 화폐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여기에 누구 형상과 글이 적혀 있냐고 물으십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돈을 보면 역사적인 인물이나 상징적인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는 화폐에는 가이사 즉 로마 황제 얼굴과 황제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동전을 보고 가이사 얼굴과 가이사 이름이 적혀 있다고 말을 했지요. 그러자 2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返しなさ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그래? 이 동전에서 너희는 로마 황제를 보느냐. 그렇다면 황제에게 바쳐라. 하지만 이 동전에서 하나님을 보느냐. 그렇다면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생각하기에 이 돈이 로마 황제 것으로 여긴다면 로마 황제에게 바쳐라.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기에 이 돈이 하나님의 것으로 여긴다면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니 질문한 사람들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로마서 6장 12절~13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2.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13.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12절을 보면 ‘너희 죽을 몸(死ぬべきからだ)’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육신은 때가 되면 죽을 몸, 때가 되면 내 주어야 할 몸입니다. 그런데 죄로 하여금 우리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의 영락교회를 세우신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집을 잠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읽지는 못하고 잠시 몇 페이지를 보았을 뿐입니다만, 거기에 보니까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대략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기억합니다.

“새가 많이 날아다니는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할 수 없으나 새가 머리 위에 앉아 둥지까지 만들게는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저는 참 여러 가지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첫째는 그래,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닐 수는 있다. 즉, 아무리 착해 보이는 사람, 아무리 선해 보이는 사람도 다 안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을 가질 수가 있구나, 나에게 나쁜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자기 자신을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그래, 아무리 나쁜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생각이, 마치 새들이 내 머리 위에 앉아 둥지를 만들듯이 그와 같은 나쁜 생각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는 위로였습니다.

아무리 의인인 척해봐도 아무리 거룩한 척을 해봐도 우리는 천상 예수님 없이는 일거수일투촉이 죄에서 시작해서 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면서도 교회 바깥에 나가서는 어느새, 아, 나는 세상적인 생각을 믿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합니다. 하게 됩니다.

목사라고 별것입니까. 예전에 보니까 어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도 강단에서 내려가면 한 기독교인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사라고 무슨 예수님이에요? 선지자에요? 아니에요. 똑같습니다. 무엇이 똑같냐 하면 머리 위에 새들이 날아다닌다는 것, 크고 작은 잡념이 오락가락 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내 머리 위에 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죄악들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있는 것처럼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따먹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가 하와에게 다음과 같이 유혹을 합니다.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먹지 않음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 그러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어기게 만들기 위해서 하와의 마음 안에 무엇을 심어 놓게 되냐 하면 바로 욕심,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하는 욕심, 하나님의 명을 어기게 된다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욕심을 심어 놓게 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디 있었다고 했습니까.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에덴 어디에서 보아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저 나무 열매, 하나님이 그토록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그러셨을까. 먹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호기심이 있을 수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위로 크고 작은 각종 새들이 날아다니는 단계입니다. 아직 둥지를 틀지 않았어요.

선악과의 맛? 먹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 그게 뭐가 중요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 먹지 말면 되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끝내면 되었을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니까 둥지를 틀게 돼요? 그렇습니다.

저걸 먹으면 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는 욕심이 내 마음에 들어오자 그 욕심이 내 몸을 마비시킵니다. 내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내 욕심에 순종한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9절 후반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죄를 지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욕심과 죄와 사망의 관계를 기가 막히게 정리해놓은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そして、欲がはらんで罪を生み、罪が熟して死を生み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욕심과 죄와 사망이라는 것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아 욕심과 죄와 사망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욕심이 생기고, 둘째로 그로 인해서 죄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 이 공식을 거꾸로 하면 되겠지요.

욕심이 생기고 죄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하니까, 사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으면 되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욕심을 버리면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보면 참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아, 나는 좀더 가난해 져야지. 나는 좀더 불행해 져야지. 그런 생각으로 죄를 짓나요?

생각해보세요. 좀 더 가난해지려고 다른 사람들한테서 돈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아요? 불행해지려고 뇌물을 주고 사기를 치고 그러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들이 풍족해 지려고, 자신들이 좀 더 나아지려는 욕심을 가지고 죄를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12절 말씀에 보면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욕’이라는 말씀이 한글로 밖에 안 적혀 있어요. 그래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성경 자료를 찾아보니까 아마도 개인적인, 사적인 욕구라는 한자로 되어 있었는데, 글쎄요. 저는 오히려 사악한 욕구……라는 한자가 맞지 않나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이를 ‘악한 욕망’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성경 중에서 대표적인 영어성경 중 하나인 NIV 판을 보아도 사악한 욕망(evil desires)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본문에 나오는 ‘사욕’에 대한 적절한 한자표기는 ‘사적인 욕구’가 아니라 ‘사악한 욕구’, ‘사악한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이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죄를 저지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와 같은 사악한 욕심, 사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죄를 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앞두고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죄인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18장 32절 エゼキエル書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わたしは、だれが死ぬのも喜ばない──神である主のことば──。だから立ち返って、生きよ。」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가끔 우리는 어떤 나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정말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죽어 마땅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든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든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회개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회개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냥 멸망하라고 놔두신다면 그게 제일 편하시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 죽어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살기를 원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공수표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면서까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을 봅니다.

로마서 6장 14절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예수님께서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드리시겠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이사에게 바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바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악한 욕심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순종의 길 은혜의 길, 그리고 구원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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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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