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32회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홍성필 2022. 3. 23. 14:25
반응형
제332회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2022년 3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6절~9절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6節~9節
“6.しかし、神のことばは無効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から出た者がみな、イスラエルではないからです。
7.アブラハムの子どもたちがみな、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サクにあって、あなたの子孫が起こされる」からです。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9.約束のみ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来ます。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7번째 시간으로서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約束の子孫となる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하나 짚어 나아가면 결코 어렵지는 않습니다.

먼저 6절 초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6절 초반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6節 前半
6.しかし、神のことばは無効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6절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今、もしあなたがたが確かにわたしの声に聞き従い、わたしの契約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族の中にあって、わたしの宝となる。全世界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から。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とって祭司の王国、聖なる国民となる。』これが、イスラエルの子らにあなたが語るべきことばである。」

이스라엘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이방인 사역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다고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 주장에 대한 근거, 즉,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서 1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방인들과 맺은 열매처럼 당신들에게 가서도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즉 로마에서도 이방인들과 믿음의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 로마서의 수신인은 대부분이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굳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은 내가 비록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니까, 너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바울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어떤 신앙이 있는 일본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다음과 같은 축복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3절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이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에게 선을 베풀면 우리도 복을 받는다……뭐, 이런 말을 저에게 진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당신들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잘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들 같은 이방인들도 복을 받는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9장 6절 후반부부터 9절까지를 다시 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6절 후반부~9절

로마서 9장 6절 후반부~9절
“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イスラエルから出た者がみな、イスラエルではないからです。
7.アブラハムの子どもたちがみな、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サクにあって、あなたの子孫が起こされる」からです。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9.約束のみ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来ます。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


바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라고 본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열두 명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열두 명의 자손이기 때문에, 각 자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이 이삭 밖에 없었나요? 아니요. 이삭 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자손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는 밤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아들 하나 없어요.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을 주지 않으세요.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갑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말하기를, 자기 여종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라고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닥달을 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인 사라가 아닌 그의 여종 하갈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도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도 태어났으니 이제 기도 응답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18절~19절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そして、アブラハムは神に言った。「どうか、イシュマエルが御前で生きますように。」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대를 이을 자녀는 이스마엘이 아니다. 그가 아니라 사라한테서 태어나는 아이인 이삭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사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면 이삭과 이스마엘 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아니에요. 더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아브라함은 새로 아내를 맞이합니다.


창세기 25장 1절~2절
1.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アブラハムは、再び妻を迎えた。その名はケトラといった。
彼女はアブラハムに、ジムラン、ヨクシャン、メダン、ミディアン、イシュバク、シュアハを産んだ。

아브라함은 사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후처를 맞이해서 아들을 6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본다면 아브라함은, 하갈, 사라, 그리고 그두라 라고 하는 세 여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요. 먼저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아내 사라 사이에서 이삭을 낳고, 그리고 후처인 그두라 사이에서 6명을 낳았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은 모두 여덟 명입니다.

그 여덟 명의 자손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을 해도,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아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낳은 이삭만이 너의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이삭과 그 외 일곱 명의 자녀들에 있어서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가 바로 8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9장 8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8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외의 자녀와 이삭에 대해서 구별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을 했냐 하면 바로 그 외의 자녀들은 ‘육신의 자녀’요,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로 구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닙니다. 모두 사람의 생각으로 태어난 자녀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앞서 살펴본 창세기 17장 19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9절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21절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しかし、わたしがわたしの契約を立てるのは、サラが来年の今ごろあなたに産むイサクとの間にである。」

이삭에 대해서는 사라가 아직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삭의 이름 뿐만 아니라 언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유가 다른 자녀들은 <육신의 자녀>였지만 이삭 만은 <약속의 자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가 무엇입니까. <언제 태어날 것이다>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인가요?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삭 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도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의 언약, 구원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그리고 야곱에서 열두 아들들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신들만이 구원 받은 백성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 말을 한 세례 요한도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표면적인 족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너희들 스스로가 자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돌멩이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오늘 말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아주 심한 차별을 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 돌멩이 수준으로 취급 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례 요한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돌멩이를 이방인으로 바꾸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차별하는 이방인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손>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다면 지금 저기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는 유전자 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로마서 1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율법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표면적인 할례가 더 이상 의미가 없듯이, 표면적인 유대인, 유전자 적인 유대인, 유전자 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육신적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인들을 돌멩이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면적인 유대인,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야말로 진정한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자, 여기서 한 번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약속>이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일까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약속이 두 가지 있습니다.

다음 힌트입니다. 하나는 오래된 약속이고 하나는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래된 약속은 구약이요, 새로운 약속은 신약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 즉 ‘성경’이 되겠지요.

오래된 약속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가 오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45절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からイエスは、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を開いて、

여기서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면 쉽게 말해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걸쳐서 예언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신약에 있는 말씀들을 네 글자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바로 ‘오시리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신약에 보시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 그것도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말씀은 어떻습니까.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지키는 자가 곧 <약속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7절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록합니까. 방언을 해야 구원을 받는데요? 40일 금식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적혀 있습니까.

아니에요.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지키고,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난 다음,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성경 기록에 의하면 부활하신 다음에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 27절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モーセやすべての預言者たちから始めて、ご自分について聖書全体に書いてあることを彼らに説き明かされた。


이 말씀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셨어요?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어요?

아니에요. 더 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셨던 것이에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알고 지켜서 행해야지만 약속의 자녀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읽지 않아요. 말씀을 보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아니,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한 번 확인을 해볼까요?

자,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무엇으로 알아본다고 성경에 적혀 있습니까.


일요일에 성수주일 하면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술 담배 안 하면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40일 금식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일요일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다리가 부러져도 가게 문은 닫아야 되고, 술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런 사람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고, 굶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40일 금식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나요? 나를 믿으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던가요?

요한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よう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줄 알아본다는 것이에요.

저 먼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주게 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축복이 임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 선택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고, 그리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2회 →

← 제331회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