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04회 율법과 구원 (2)

홍성필 2021. 10. 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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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회 율법과 구원 (2)
2021년 9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4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節~4節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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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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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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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0번째 시간으로서 “율법과 구원(2)” 律法と救い(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지난 주의 복습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이 점은 이후의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지금부터 두 가지 질문을 드릴 텐데, 이는 지난 주의 내용을 들으셨다면 전혀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다음으로 두번째 질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첫번째 질문.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두번째 질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근거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7장 1절과 7장 4절 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과 7장 4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로마서 7장 4절 전반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아직 살아 있을 때에는 율법이 우리를 체포해서 끌고 가서는 심판대 앞에 세우고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면,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잡아 갈 수도, 심판대 앞에 세울 수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율법 앞에서 죽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어서 율법에 의해 정죄 받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에 이미 살펴본 부분입니다만, 우리는 이 부분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7장 2절~3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2절~3절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이 말씀은 율법과 구원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각각 무엇이 어떤 비유인지를 살펴보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단어는, 1. 남편(夫), 2. 여인(女), 3. 법(律法), 4. 다른 남자(他の男), 5.음녀(姦淫の女).

남편과 여인이 있는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남편의 법으로 매인 바 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남녀불평등이다 남존여비다 그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의 선거권이 인정된 것 자체가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아무리 문명국이라 하더라도 과거에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들이 남성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더구나 이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시대적인 배경도 함께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보면, 여인이 남편과 결혼을 했었다고 한다면 그 남편의 법에 따라야 했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에게로 갔다면, 이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음녀, 죄인이 되고 맙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음행을 한 사람에 대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人が他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すなわち自分の隣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その姦淫した男も女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신명기 22장 22절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夫のある女と寝ている男が見つかった場合は、その女と寝ていた男もその女も、二人とも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음행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여인은 그 남편의 법에 얽매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남자, 물론 여기서는 그 남자도 배우자가 없어야 하겠지요. 아무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서 다시 혼인을 한다는 것은 음녀가 아니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각각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단어를 정리하자면, 1. 남편(夫), 2. 여인(女), 3. 법(律法), 4. 다른 남자(他の男), 5.음녀(姦淫の女).

먼저 남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신앙입니다. 여인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법은 율법을 말합니다. 다른 남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신앙이고, 마지막 음녀라는 것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당연하게도 기독교가 없었습니다. 오직 완전한 신앙은 유대교 뿐이었지요. 그래서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율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9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イエスが、彼らの律法学者たちのようにではなく、権威ある者として教えられたからである。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여기서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그들의 해석이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들으니까 정말로 새로워요. 기존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했던 말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의 해석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율법 해석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말하자면 왜곡된 율법해석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당시 종교지도자이자 기득권자였던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면 안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 하고 여러 규정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은 안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어기면 엄하게 꾸짖거나 벌을 내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율법은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서 율법이 나를 언제든지 잡아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율법을 안 지키고 다른 것을 지킨다는 것은 마치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에게로 가는 것과도 같은 음녀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사형판결을 받아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 세상 법이 우리를 심판할 수 없듯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남편이 죽어서 남편의 영향권에서부터 벗어나게 된 것처럼 우리는 이제 율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믿음,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가죽 부대는 말하자면 동물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거기에 음료를 담기도 했었는데, 이 가죽 주머니가 새로 만들었을 때에는 두껍고 탄탄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두께는 얇아지고 강도도 떨어지게 됩니다.

한편 포도주를 새로 담그게 되면 아직 숙성이 덜 되었기 때문에 발효되는 힘이 너무나 강해서 이를 오래된 가죽 주머니에 넣게 되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 담근 포도주는 반드시 새 가죽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오래된 포도주는 무엇이고 새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오래된 포도주는 율법적인 가르침,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이요,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죽 부대는 우리의 신앙, 우리들의 믿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낡은 가죽 부대가 아니라 새로운 가죽 부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약 시대 때 율법을 지켰을 당시의 낡은 가죽 부대에 집어넣게 된다면, 이는 잠시 동안은 올바른 신앙생활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모순에 빠져서 터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어떤 것이냐 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예를 들어서 먹는 것의 문제나 할례에 대한 논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가르침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가르침도 좋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버릴 수가 있느냐.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율법대로 할례도 받아야지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나에게로 오면 내가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만, 1차적으로는 그 엄격하고 어려운 율법을 지키느라고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율법을 무시해도 되니까?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율법에 정해진 형벌에 대해서는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너희들은 자유함을 얻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에도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 넘치고 있는 것들이 뭐냐 하면 자기들만의 율법입니다. 특히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만의 율법 해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개였습니다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이를 2134개까지 늘려 놓았습니다.

교회에 본다 하더라도 여러 규칙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 운용에 있어서는 이에 필요한 규칙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에도 없는, 또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 번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여러분께서는 무엇이 우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생각하기에 당연히 하나님 사랑이 우선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단히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하나님께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 전체를 뜻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우리 이웃과의 화해를 비교한다면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예배를 드리다가도 이웃과 화해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면, 우선 이웃과 화목한 다음에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율법이라는 것을 드리 대면서 이웃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 터뜨려버리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경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일요일에 일을 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요일에 가게 문을 열거나, 아니면 일요일에 출근을 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아니,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일요일은 반드시 안식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또한 가죽 부대를 터뜨리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이 되면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뀐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에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구제도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업을 잠시 쉴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업무상 일요일에 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끔은 교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요, 그리고 도저히 문을 닫을 수 없다면 예배 시간만이라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분들이 많은 경우에는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안 지킨다는 등 주일을 안 지킨다는 등 하는 식으로 비난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잘못 알면서 가죽 부대를 터뜨리고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 반드시 쉬어야 한다고 한다면, 업무에 따라서는 일요일날 당직을 서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요일은 모든 것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일요일 당직도 거절해야 하는 것인가요?

지금 한국이나 일본이나 코로나 때문에 의료진 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공무원들도 밤낮없이 쉬지 못하고 일에 쫓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도, 아, 나는 주일을 지켜야 하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까, 그러면서 일을 안 하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365일 24시간 운영을 해야 하는 편의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잖아요? 아니면 그 시간에는 다른 알바생한테 맡겨놓고 자기만 주일을 지켜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어요?

그럼 또 그러실 지도 모르지요. 교회 안 나가는 사람한테 맡겨놓으면 된다. 뭐 그러시겠습니까? 아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전도를 해서 같이 교회에 나올 생각을 해야지, 자기 믿음 생활을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한테 맡겨놓고 나온다면 그게 신앙인으로서 온전한 모습이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지금 이 순간도 여기저기에서 가죽 부대가 뻥뻥 터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이웃을 비판하고 주님께 슬픔을 안겨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율법에 대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도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 중에서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전히 하나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전한 이웃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율법과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튼튼한 가죽 부대에 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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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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