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82회 구원에 이르는 길

홍성필 2021. 7. 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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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회 구원에 이르는 길
2021년 4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9절~12절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9節~12節
“9.それでは、この幸いは、割礼のある者にだけ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割礼のない者にも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アブラハム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と言っていますが、
10.どのようにして、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しょう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すか。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はなく、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
11.彼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に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ことの証印として、割礼というしるしを受けたのです。それは、彼が、割礼を受けないままで信じるすべての人の父となり、彼らも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あり、
12.また、単に割礼を受けている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割礼を受けていなかったときの信仰の足跡にしたがって歩む者たちにとって、割礼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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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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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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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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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8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 救いに至る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이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제 믿음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그 전까지는 안식일 때마다 자기가 지은 죄를 해결 받기 위해서 집안 형편에 따라 짐승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랬습니다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사람이 드렸던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때까지 행하던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사로 드려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진정 혁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변화가 이제 믿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기들만이 구원 받은 백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아니, 자기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전세계 땅끝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할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할례에 대해서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2절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さて、ある人々がユダヤから下って来て、兄弟たちに「モーセの慣習にしたがって割礼を受けなければ、あなたがたは救われない」と教えていた。
それで、パウロやバルナバと彼らの間に激しい対立と論争が生じたので、パウロとバルナバ、そのほかの何人かが、この問題について使徒たちや長老たちと話し合うために、エルサレムに上ることになった。

여기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이란 그들이 형제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더라도 모세의 법, 그러니까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초대교회 내에서는 크나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할례라고 하는 문화가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이방인이 말하기를 이제 좋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내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 내 평생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다.

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해보죠.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입니다.

어 그래? 좋다. 그러면 할례를 받아야지만 제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이제 바지 벗고 여기 누워.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흔쾌히 바지를 벗고 누워서 할례를 받을 만한 이방인이 얼마나 있겠냐는 거죠. 사실 당시로서도 이 문제, 그러니까 예수님을 전할 때에 할례도 반드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선교 자체를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수 백년이 아닌, 수 천년 동안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들어왔던 그들입니다. 할례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근거이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하는 생각은 그들에게 있어서 설명이 필요 없는, 말하자면 상식 중의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할례라고 하는 조건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당연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이와 같은 주장에 반대를 합니다. 참 이렇게 보면 바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인물입니다.

먼저 이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사도행전 22장 27절~29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そこで、千人隊長はパウロ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に言いなさい。あなたはローマ市民なのか。」パウロは「そうです」と答えた。
すると千人隊長は言った。「私は多額の金でこの市民権を手に入れたのだ。」パウロは言った。「私は生まれながらの市民です。」
そこで、パウロを取り調べようとしていた者たちは、すぐにパウロから身を引いた。千人隊長も、パウロがローマ市民であり、その彼を縛っていたことを知って恐れた。

빌립보서 3장 5절~6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その熱心については教会を迫害したほどであり、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は非難されるところがない者でした。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즉, 그는 당시 비록 로마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으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자였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정통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한다면, 당시에는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지가 상당히 중요했었는데, 당시 가말리엘에 대해서 사도행전 5장 34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5장 34절 전반부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ところが、民全体に尊敬されている律法の教師で、ガマリエルというパリサイ人が議場に立ち、使徒たちをしばらく外に出すように命じ、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인물은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율법교사라고 합니다. 이를 다시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선생을 존경하고 배우고 싶어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상당히 인정 받을 만 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자면 지금으로 본다면 명문대를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는 스스로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이는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배경, 그리고 성장과정으로 본다면,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생각, 변화를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할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할례는 반드시 받아야만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바울이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설마 바울이 그런 주장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 믿음이야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정말 참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그 근거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시기와 할례를 받은 시기를 비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데,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시기 전에, 우선 한 번 창세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고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는데, 그렇다면 이 당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상황이었냐는 것이지요. 정답은 뭐냐 하면, 아니요. 당시는 아직까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할례를 언제 받았냐 하면, 창세기 12장도 15장도 아닌, 이보다도 뒤인 창세기 17장에서입니다.

창세계 17장 23절~25절
"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そこでアブラハムは、その子イシュマエル、彼の家で生まれたすべてのしもべ、また、金で買い取ったすべての者、すなわち、アブラハムの家のすべての男子を集め、神が彼に告げられたとおり、その日のうちに、彼らの包皮の肉を切り捨てた。
アブラハムが包皮の肉を切り捨てられたときは、九十九歳であった。
その子イシュマエルは、包皮の肉に割礼を受けたとき、十三歳であった。

이는 앞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의롭게 여기신 지 무려 20여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시고 의롭게 여기셨을 때, 나중에 할례를 받을 것을 필수조건이라고 하시면서 복을 주시고 의로 여기셨냐 하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중에서 9절과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9절~10절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それでは、この幸いは、割礼のある者にだけ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割礼のない者にも与えられる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アブラハム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と言っていますが、
どのようにして、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のでしょう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すか。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か。割礼を受けてからではなく、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です。

이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드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를 받고 난 다음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4장 11절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彼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きに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ことの証印として、割礼というしるしを受けたのです。それは、彼が、割礼を受けないままで信じるすべての人の父となり、彼らも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あり、

할례라고 하는 것은 당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근거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나중에 하나님의 명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할례라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받음으로 인해서, 그가 받은 축복이 모두 승인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12절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また、単に割礼を受けている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割礼を受けていなかったときの信仰の足跡にしたがって歩む者たちにとって、割礼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만약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난 다음에 모든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믿음의 조상이 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살펴보았을 때 바울이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 있어서 할례는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이 할례를 대신하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요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손에 물을 적셔서 머리에 살짝 붓는 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시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성경적인 세례는 온몸이 물속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말하자면 침례가 본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약식의 세례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형식에 있어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의 경우 창세기 17장 11절~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할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만, 세례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구약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은 세례가 있었을까요? 아니요. 구약에서는 세례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고,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 때에 보니까 어떤 분께서, 구약에서 나아만 장군 때 세례가 등장하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왕기하 5장 14절에 보면 당시 나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 장군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더니 치료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만, 이는 세례라기보다는, 엘리사가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고 해서 이에 순종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는 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치유의 역사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렸던 할례에 대한 논쟁이 있고 난 다음에 할례는 점차 사라져가고 세례를 베푸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례에 대해서는 구약에서 할례처럼 하나님이 직접 명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御霊が、ある人の上に降って、その上にとどまるのをあなたが見たら、その人こそ、聖霊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授ける者である。』

여기서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천사나 성령님으로부터 명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기독교에 있어서는 할례가 아니라 세례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례 하나만을 두고 보아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우리 교단에서는 정식교인으로 인정하는 절차로 세례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고, 그리고 유아세레를 받는 경우에는 만 18세가 되면 이는 세례식이 아니라 입교식을 통해서 교인으로 가입이 됩니다.

그렇다면 할례와 세례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선 할례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첫째로, 할례는 남성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는 여성도 할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창세기 17장 10절에 보면 할례는 분명히 남자에 대해서만 명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할례는 절차가 매우 어렵습니다. 남성의 포피를 베는 것인데, 이를 받으면 며칠 동안은 거동을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4장 25절에 보면 할례를 받은 지 3일이 지났는데도 아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할례는 몸에 흔적이 남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신앙을 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 번 받은 할례의 흔적은 몸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되지요.

이에 반해 세례의 특징은 어떻습니까. 쉽게 말해서 지금 말씀 드린 것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세례는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세례는 절차가 매우 쉽습니다. 약식으로 하는 일반적인 세례는 젖은 손으로 머리에 물을 살짝 붓는 것이기 때문에 물이 좀 흐른다 하더라도 손수건으로 닦으면 되는 것이고, 물속에 몸을 모두 담그는 침례라 하더라도,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세례는 외견상 몸에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아무리 21세기 최신의학기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육체적으로 이 사람이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 또한 세례의 대단히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할례의 시대가 아니라 세례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아만 되느냐 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물로 세례를 받기만 한다고 해서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고,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꼭 집사나 권사나 장로가 되어야지만 구원을 받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직분에 대해서 너무나도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에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교회 어떤 모임에 있을 때, 거기서는 그 모임 자체적으로 매주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침 거기서 그 주보를, 도중에 잠시 공백기간이 있었습니다만, 대략 7년 정도 만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주보에는 매주 후원금을 내주시는 분들을 적었는데, 거기에는 성함 뒤에 직분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 장로, 누구누구 권사, 누구누구 집사나, 형제, 자매…… 이렇게 이름 뒤에 직분을 적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제게 이런 말을 해요. 당사자가 제게 직접 말을 한 것은 아니고, 누군가를 통해서 저에게 온 말이었는데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회 직분에 보면 집사님도 계시고 안수집사님도 계시잖아요? 하지만 당시 저는 안수집사님도 주보에 적을 때에는 그냥 ‘집사’라고만 적었었는데, 그런데 그 분은 안수집사인 자기 남편 이름을 적을 때 누구누구 집사가 아니라 누구누구 안수집사라고 넣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얼마나 참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만약 집사라고만 하면 같은 이름인 분이 계시기 때문에 굳이 안수집사라고 넣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라고 하면 네 글자나 되는데, 칸도 좁은 곳에 직분을 일반적인 사람 이름보다 길게 네 글자나 적으라는 거잖아요.

물론 기술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 권사, 집사, 형제, 자매……이렇게 다른 직분들은 두 글자인 곳에 네 글자를 넣는다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어요.


저도 작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해보려고도 했습니다만, 문득 제게 든 생각이 뭐였냐 하면, 아니, 도대체 이 분은 뭣 때문에 직분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보다 연배도 한참 위이시고, 그리고 그 사람이 직접 제게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닌데, 찾아가서 뭐라고 말씀 드리는 것도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이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만, 그 결과 어떻게 했냐 하면, 그 다음 주부터 주보에 후원자 성함을 적는 곳에서 직분을 모두 다 빼버렸습니다.

그 전에는 이름을 적는 순서도 그래도 직분을 배려해서 적었었습니다만, 그 때부터는 장로님이건 권사님이건 모든 직분을 다 빼고 이름 세 글자, 그리고 가나다순으로 적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런 말씀도 못하지요. 장로님도 권사님도 직분을 안 적었는데, 설마 그래도 자기 남편만 안수집사라고 넣어달라고 그러겠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앉을 때, 목사님 먼저 앉고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 순으로 앉는 대요? 아니요. 그런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디를 보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직분이 무엇이었는지, 하물며 우리가 세례를 받았는지, 받았다면 언제 받았는지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든지 괴로움 속에 빠질 때라 하더라도 우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할례에 있는 것도 아니요, 세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형식에 있는 것도 직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으면 삽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끌어 주십니다. 이길 힘을 주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축복에 축복을 채워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우리의 중심을 바라보시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예수님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치고 모든 좌절과 절망을 물리쳐서, 크나큰 승리를 거둠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기쁨으로 구원 받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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