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80회 희생제물의 참뜻

홍성필 2021. 7. 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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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회 희생제물의 참뜻
2021년 3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1절~23절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出エジプト記 12章 21節~23節
“21.それから、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をみな呼び、彼らに言った。「さあ、羊をあなたがたの家族ごとに用意しなさい。そして過越のいけにえを屠りなさい。
22.ヒソプの束を一つ取って、鉢の中の血に浸し、その鉢の中の血を鴨居と二本の門柱に塗り付けなさい。あなたがたは、朝までだれ一人、自分の家の戸口から出てはならない。
23.主はエジプトを打つために行き巡られる。しかし、鴨居と二本の門柱にある血を見たら、主はその戸口を過ぎ越して、滅ぼす者があなたがたの家に入って打つことのないように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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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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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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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희생제물의 참뜻” いけにえの真意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한 주는 이를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주간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때로는 지루할 때도 있겠지만, 성경을 읽는 법을 알게 되면 이 지루한 성경이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성경을 읽는 법, 이 성경, 특히 구약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은 바로 딱 한 곳을 향해서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한 곳은 어디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의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그 피로 구원을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도 반복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聖書の中に永遠のいのちがあると思って、聖書を調べています。その聖書は、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いるものです。


어떤 분은 어차피 일어날 사건인데 왜 굳이 예언되었는지 궁금해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예언이 되었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미리 예언이 되고 이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는 우연히 어쩌다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마침내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 하나인 유월절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일찍이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혜를 얻게 된 요셉은 당시 오랜 가뭄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애굽을 풍요롭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야곱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들여서, 먹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서, 마침내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큰 민족,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그처럼 지혜롭고 좋은 정치를 하는 요셉을 존경하고 따랐으나, 그가 죽고 이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애굽에서 정권을 잡게 되자,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경계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기에 이릅니다. 그 가혹한 기간은 400년 가까이 이어집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때가 찼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それから何年もたって、エジプトの王は死んだ。イスラエルの子らは重い労働にうめき、泣き叫んだ。重い労働による彼らの叫びは神に届いた。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 땅으로 보내서 애굽의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도록 협상을 벌이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 협상은 애초부터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출애굽기 7장 3절~4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아홉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동안에도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1장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わたしはファラオとエジプトの上に、もう一つのわざわいを下す。その後で彼は、あなたがたをここから去らせる。彼があなたがたを去らせるときには、本当に一人残らず、あなたがたをここから追い出す。

그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냐 하면 출애굽기 11장 5절~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11장 5절~6절
“5.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エジプトの地の長子は、王座に着いているファラオの長子から、ひき臼のうしろにいる女奴隷の長子、それに家畜の初子に至るまで、みな死ぬ。
そして、エジプト全土にわたって大きな叫びが起こる。このようなことは、かつてなく、また二度とない。』

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첫 아이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다 죽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큰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외하고>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 무서운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를 피할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23절부터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3절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3.主はエジプトを打つために行き巡られる。しかし、鴨居と二本の門柱にある血を見たら、主はその戸口を過ぎ越して、滅ぼす者があなたがたの家に入って打つことのないようにされる。

오늘 본문에 보면 <유월절>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만, 이는 오월, 유월이 아니라, 건너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기만 하면, 멸하는 자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건너뛴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 멸하는 자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건너 뛰어가게 할 수 있냐 하면, 그 방법이 오늘 본문 중에서 출애굽기 12장 21절~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1절~22절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1.それから、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長老たちをみな呼び、彼らに言った。「さあ、羊をあなたがたの家族ごとに用意しなさい。そして過越のいけにえを屠りなさい。
22.ヒソプの束を一つ取って、鉢の中の血に浸し、その鉢の中の血を鴨居と二本の門柱に塗り付けなさい。あなたがたは、朝までだれ一人、自分の家の戸口から出てはならない。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되면, 그 멸하는 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인방이라고 하는 것은 출입문의 가로로 된 기둥이고 문설주는 좌우 문설주라고 할 정도이니까 세로로 된 기둥이지요. 이는 가로와 세로로 된 기둥, 즉 십자가를 상징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이라고 하는 말씀은 신구약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이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십자가, 예수님의 피가 묻은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중요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마음에 새기게 되면, 우리를 멸망하려는 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건너 뛰어가가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릴 때에는 항상 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제물들을 보면 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 보면 제물에 대한 여러 규정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율법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위기 5장 6절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ために償いとして、羊の群れの子羊であれ、やぎであれ、雌一匹を主のもとに連れて行き、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のために、罪を除いて宥めを行う。

레위기 22장 19절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あなたがたが受け入れられるには、それは牛、羊、あるいはやぎのうちの、傷のない雄で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양이나 염소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흠 없는 제물을 원하십니다.

어떤 분은 아, 하나님께서는 새끼 양이나 염소처럼 부드러운 고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래요, 설마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자꾸만 그런 말을 하다 보면, 자칫 성경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 전해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무슨 이빨이 튼튼하지 못해서, 어린 양이나 염소를 가져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럴 리야 없지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양이나 염소라고 하지 않으시고 굳이 어린 양이나 염소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바쳐야 할 희생제물에 대한 비밀이 숨겨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힌트를 잠시 드리자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제물로 드리는 어린 양이나 염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을 때 그것은 바로 <스스로 죽은 짐승>이 아닐까 합니다.

자, 다시 한번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양이나 염소라고 하지 않으시고 굳이 어린 양이나 염소라고 말씀 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어쩌면 대단히 간단한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답은 바로 어린 양이나 염소, 흠 없는 양이나 염소를 <사람이 가장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 앞으로 갈 때에는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바쳤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고기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요?

시편 22편 28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王権は主のもの。 主は 国々を統べ治めておられます。

시편 24편 1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地とそこに満ちているもの 世界とその中に住んでいるもの それは主のもの。

시편 89편 11절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天はあなたのもの 地もあなたのもの。 世界とそこに満ちているものは あなたが基を据え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우주만물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そこ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야들야들한 부드러운 고기를 좋아하셔서 어린 양이나 염소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장 아끼는 것,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바로 그 마음을 보시고자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고기를 단순히 바쳐야 했었다면, 굳이 가장 아끼는 어린 양이나 염소가 아니라, 스스로 죽은 것을 바치는 것이 훨씬 더 세상적으로 본다면 경제적이리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늙어 죽은 고기라면 좀 질길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뭐, 하나님이 질겅질겅 씹어 드실 것이 아니라, 어차피 불로 태워 드릴 예물이라면 늙어 죽은 짐승이라도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7장 24절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動物の死骸にある脂肪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動物の脂肪は、何に使っても差し支えない。しかし、決して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

레위기 17장 15절
“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스스로 죽은 것들은 그 고기를 먹은 사람들도 부정하다고 하는데, 어찌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스스로 죽은 짐승들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바치는 손길은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은 것,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는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폐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은 쓰레기 소각장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아끼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の間で最初に胎を開く長子はみな、人であれ家畜であれ、わたしのために聖別せよ。それ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

왜 처음 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 자신이 가장 아까워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마음을 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희생제물의 참뜻을 가장 처음 알았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이는 바로 아담의 아들 아벨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바친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데,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그 두 사람이 바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시나요?


창세기 4장 2절~5절 중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4장 2절~5절 중반부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彼女はまた、その弟アベルを産んだ。アベルは羊を飼う者となり、カインは大地を耕す者となった。
しばらく時が過ぎて、カインは大地の実りを主へ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来た。
アベルもまた、自分の羊の初子の中から、肥えたものを持って来た。主はアベルとそのささげ物に目を留められた。
しかし、カインとそのささげ物には目を留められなかった。……

가인도 아벨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으니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기 때문에 양을 제물로 드렸지요.

사람이 고기를 먹게 된 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양을 기르는 목적은, 글쎄요. 양의 젖을 먹었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그 털로 옷을 짜는 정도 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가치로 본다면 고기라고 해서 채소들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합니다.

채소를 바쳤건 양을 바쳤건 이 사실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당시 절대적인 가치의 차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바친 제물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제물에 담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그저 채소를 바쳤을 뿐이었는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재물을 바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고기 그 자체가 아니라 아벨의 그 마음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시면서 우리에게만 자기가 아끼는 것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자, 아니, 하나뿐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예배 시간에 하시는 말씀이,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결혼생활이 얼마나 어려우면 예수님도 안 하셨겠냐……이런 말씀을 설교시간에 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만, 제가 간곡히 말씀을 드리는데, 목사님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 싱거운 말씀은 부디 예배 시간 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때에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만일 어딘가에서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시거나, 아니면 장차 듣게 되더라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그냥 흘려 보내시기 바랍니다.

본인들은 재미 있으라고 하는 말씀인지 모르지만, 그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적이지 않은 말씀들을 농담이라고 하니 참 답답할 따름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절~4절
“3.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夫は自分の妻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同じように妻も自分の夫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なさい。
妻は自分のからだについて権利を持ってはおらず、それは夫のものです。同じように、夫も自分のからだについて権利を持ってはおらず、それは妻のものです。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서로간에 의무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서 그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정이나 사회에 얽매이기 전에 하나님께 바쳐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젊은 날 동안 평안히 즐겁게 사시다가 나이 들어 돌아가신 다음에 바쳐지신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나이가 대략 30대 초반, 33세 정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회적으로 얽매이기 전인 어린 양이실 때에 하나님 앞에 흠없는 재물로 바쳐지셨다는 사실, 하나님께 있어서나 사람에게 있어서나 가장 아끼는 제물, 가장 귀한 제물로 바쳐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이제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명기 6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그렇다고 무조건 많은 돈이나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을 바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5장 7절~8절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8절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新しいこねた粉のままでいられるように、古いパン種をすっかり取り除きなさい。あなたがたは種なしパンなのですから。私たちの過越の子羊キリストは、すでに屠られたのです。
ですから、古いパン種を用いたり、悪意と邪悪のパン種を用いたりしないで、誠実と真実の種なしパンで祭り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여기서 누룩이라고 하는 것은 발효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누룩을 넣고 떡을 구우면 떡이 말랑말랑하게 부풀어오르게 됩니다만, 누룩이 안 들어가 있으면 전병이나 과자처럼 딱딱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면서 누룩이 없는 떡을 먹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 세상적인 생각, 세상적인 계산, 세상적인 욕심을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전함과 진실함을 갖는다는 뜻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최고의 제물은 순전하고 진실한 우리 마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마음을, 그 사랑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희생제물의 참뜻을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제물인 우리가 가장 아끼는 우리의 마음을, 그 사랑을, 아낌 없이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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