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320회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홍성필 2022. 2. 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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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회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2022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5章17節
“17.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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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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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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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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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이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한다면, 한 해, 한 달, 하루, 한 시간, 1분 1초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작년 2021년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이제 새롭게 시작한 2022년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기쁘고 놀라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이신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마음을 깨달아, 올 한 해 2022년을 멋지게 보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 첫 예배 시간을 맞이해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新しく造られた者になりましょう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가요? 아니면 좀 오래된 피조물인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은 아니겠지요. 적어도 태어나서 몇 십년이 지난 상황인데 이제 와서 새롭다고 하면 좀 쑥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새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지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때묻지 않은 상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자동차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구입을 해서 사용했어요. 그렇다면 이는 그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중고품이 되고 맙니다. 그 순간부터 낡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새 차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이미 중고차입니다. 아무리 부품을 바꾸고, 바퀴를 바꾸고, 비닐을 다시 씌어 본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새 차처럼’ 보이게 한 것일 뿐이지 진정한 새 차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예,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人にはできないことが、神にはできるのです。」

사람의 힘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새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새롭다’는 의미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가령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이는 기존에 있던 것과 비슷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다시 말해서 과거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믿음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그냥 교회 안 가면 찝찝하고, 헌금 안 내면 왠지 벌 받을 것 같아서 내고, 습관에 젖어서 아무런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는 믿음이었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むしろ、冷たいか熱いかであってほしい。
そのように、あなたは生ぬるく、熱くも冷たくもないので、わたしは口からあなたを吐き出す。


이는 이도 저도 아닌 믿음을 말합니다. 커피를 보세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하면 맛이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 여름에는 시원한 커피 한 잔이 얼마나 추위와 더위를 식혀줍니까.

우리의 믿음도 뜨거운 믿음과 차가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차가운 믿음이라고 해서 이상한 말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열정적으로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침착하게 나를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이처럼 침착하게 주님과 나 사이에서 묵상하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커피는 겨울에도 여름에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니요, 침착하게 주님과 마주 대하는 것도 아닌, 그저 매사에 믿음이 뜨뜨미지근한 상태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토하여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은 미지근한 믿음이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을 회복해서, 새로운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찌 보면 요즘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훈련이 잘 안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차가운 믿음 중의 핵심이 바로 이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약한 부분이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이에요.

금식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말씀을 잘 알지 못해요.

아니, 본인은 많이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 성경에 대한 지식은 그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목사님한테 들었던 설교내용이나, 부흥회 가서 부흥 강사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목사님들도 많고 그렇습니다만, 제 경험으로 본다면, 어떤 분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아니면 심한 경우에는 성경에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경우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기도 속에서 응답을 받았다면서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들을 책으로 써서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재판에서 검사가 이랬다고 칩시다.

아,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생긴 것부터 나쁜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범인은 저 사람이 분명합니다. 저 사람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사실 뭐 검사가 이런 경우는 없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이렇게 검사가 주장을 했다고 한다면, 판사는 이 검사의 말을 믿고 유죄판결을 내릴까요? 아니요. 그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법조문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은 무슨 법 몇 조 몇 항을 위반했습니다. 그리고 증거와 증인은 이러이러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해야지 거기에 적합한 판결을 판사가 내릴 텐데, 그러지 않고, 아, 저 생긴 것 보세요. 나쁘게 생겼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저런 나쁜 놈이 어디 있어요……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주장을 해봐도 자신이 원하는 판결을 받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도 기가 막히게 하고, 40일 금식을 몇 번이나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5절 중반부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聖書はあなたに知恵を与えて、キリスト・イエスに対する信仰による救いを受けさせることができます。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도, 아무리 유명한 신학 서적들도 결국은 성경의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더욱더 성경을 가까이 해서, 이 성경,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새로워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행함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성경에 있어서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행함이 없어요. 말만 할 줄 알고 손 하나 까닥 안 해요. 그러면 그 믿음과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5절~17절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고 헌금이나 십일조 내고, 식사 때 기도하고, 뭐 그 정도면 신앙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합니다.

신앙은 뜨거운 믿음을 가진 가슴이나, 냉철한 지식을 가진 성경 말씀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입각한 행함이 있어야 모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3절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木を良いとし、その実も良いとするか、木を悪いとし、その実も悪いとするか、どちらかです。木の良し悪しはその実によって分かります。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의 ‘열매’를 ‘행함’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만약에 여기서의 ‘열매’를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는 우리는 항상 ‘행함’을 해야 합니다. 즉, 행함을 위한 믿음과 행함을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모든 믿음과 말씀은 항상 행함이 동반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말하자면 성과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했다 하고 자랑하기만 하면서, 이것이 마치 믿음과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혈관을 본다면 혈액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혈관 속을 혈액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흐르고 있는가 하면, 대략 시속 200킬로 이상의 속도로 돌고 있다고 합니다. 대단히 놀랍지요.

그런데 만약에 피가 그 속도로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금방 목숨을 잃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도는 피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우리 몸 안에서 순환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행함을 위한 믿음, 행함을 위한 말씀만 강조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혈액이 일방통행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쉽게 지쳐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믿음에서 시작하여 말씀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행함이 있었다면, 그 결과는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할 수가 있고, 더 많은 말씀의 깨달음과 더 많은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이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로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로운 축복, 놀라운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2022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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