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55회 죄를 다스리라

홍성필 2021. 7. 1.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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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회 죄를 다스리라
2018년 11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3절~7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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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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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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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죄를 다스리라” 罪を治め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 대단히 비극적인 사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아벨 살인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슨무슨 살인사건이다……라고 하면 범인을 찾는 내용입니다만, 이 사건에서 범인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의 형, 가인이 범인인 것이지요.

성경에서 이 내용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우리에게는 익숙한 부분일 수도 있겠으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 동안 우리가 놓쳤던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 아벨살인사건을 통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형이 아우를 죽인 충격적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특히 익숙한 내용, 내가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내용일수록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성경에 적혀 있는 부분들, 즉 사실관계를 명확히 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내용을 보면 오늘 말씀에서 등장인물은 두 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이지요. 형은 가인이고 동생은 아벨입니다.

자, 그 다음에 창세기 4장 3절~5절 중반까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4장 3절~5절 중반까지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しばらく時が過ぎて、カインは大地の実りを主へ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来た。
アベルもまた、自分の羊の初子の中から、肥えたものを持って来た。主はアベルとそのささげ物に目を留められた。
しかし、カインとそのささげ物には目を留められなかった。……

먼저, 사건의 발단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이 바친 제물은 안 받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먼저 이 부분부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하는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다만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信仰によって、アベルはカインよりもすぐれたいけにえを神に献げ、そのいけにえによって、彼が正しい人であることが証しされました。神が、彼のささげ物を良いささげ物だと証し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彼は死にましたが、その信仰によって今もなお語っています。

라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부분을 들어 많은 주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벨은 자신이 바칠 제물을 잘 골라서 결정했는데 가인은 대충 그냥 아무거나 바쳤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도 합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말씀을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항상 동물로 드려야 한다? 아니요. 율법에 보면 밀가루나 곡물로 드리는 예물도 있습니다. 또한 아벨은 제물을 선별했는데 가인은 선별하지 않고 대충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게 어디 적혀있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적혀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꾸 자기 생각을 억지로 집어넣게 되면 성경에 담긴 본연의 뜻에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왜 그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엉터리라서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이 사건에 있어서 그 부분은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핵심적인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부분을 생략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건에 있어서 핵심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바로 창세기 4장 5절 중반부터 7절까지입니다.


창세기 4장 5절 중반부터 7절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それでカインは激しく怒り、顔を伏せた。
主はカインに言われた。「なぜ、あなたは怒っているのか。なぜ顔を伏せているのか。
もしあなたが良いことをしているのなら、受け入れられる。しかし、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 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부분을 보면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가인은 지금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가인이 화가 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자신의 아우인 아벨이 드린 예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는데 자신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또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을 가인이 알았다는 것은, 반대로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셨다는 사실을 아벨도 알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눈으로 봐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거부했다는 사실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때 아벨이 보는 앞에서 가인은 대단히 큰 수치심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4장 7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 7절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もしあなたが良いことをしているのなら、受け入れられる。しかし、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 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 그것은 그 이유를 가인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외면하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안색이 변했습니다. 말하자면 빨간 불이 켜진 것입니다. 이를 누가 먼저 알아차리셨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어? 너 왜 그래? 일이 이렇게 된 게 누구 잘못인데? 그 원인이 다 너한테 있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 지금 조심해. 지금 죄가 너를 노리고 있다. 죄가 너를 덮치려고 하는데, 넌 거기 넘어가면 안 돼. 죄를 다스려야 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결국 폭주를 하고 맙니다. 폭주가 무엇입니까. 나중 일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 감정에 맡긴 채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를 다스리지 않고 죄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가 버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자동차에서 핸들도 잡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있는 힘껏 가속페달을 밟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만약에 그랬다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는 여기 저기에 부딪힐 것이요, 웅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칠 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맙니까.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カインは弟アベルを誘い出した。二人が野にいたとき、カインは弟アベルに襲いかかって殺した。

사람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이와 같은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서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자신이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서 가인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4장 11절~12절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今や、あなたはのろわれている。そして、口を開けてあなたの手から弟の血を受けた大地から、あなたは追い出される。
あなたが耕しても、大地はもはや、あなたのために作物を生じさせない。あなたは地上をさまよい歩くさすらい人となる。」

당시는 아직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기까지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결국 노아의 홍수 때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가인의 행동을 보면 그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고 두 가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알았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냐 하면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물을 거부하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알지 못했던 두 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분노의 대상입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반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을 다른 사람한테 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이 본인에게 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탓으로 하지 않고 남 탓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제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맞아. 저 사람은 맨날 남 탓을 하고 있어. 누구누구도 맨날 자기 탓은 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해……. 여러분, 성경은 우리더러 그런 생각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나부터 먼저 남의 탓을 하고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라고 주신 말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맨날 그런 생각, 잘 된 건 내 탓, 잘못된 건 남의 탓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가인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인이 몰랐던 것은, 자신이 그와 같은 행동을 저지르고 어떠한 형벌을 받을지 몰랐습니다. 비록 그가 즉시에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도 모두 버림을 받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버림을 받은 사울 왕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さて、主の霊はサウルを離れ去り、主からの、わざわいの霊が彼をおびえさせた。

사무엘상 28장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サウルは主に伺ったが、主は、夢によっても、ウリムによっても、預言者によって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자 이제 악령이 그를 지배합니다. 사울은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그에게는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오로지 죽음만이, 오로지 파멸 만이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노릇입니까.

가인은 아벨만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속이 후련할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잘만 하면 하나님한테도 들키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에게는 이제 죽음과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또 하나는 일본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이른바 피씨방 살인사건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의하면 지난달 2018년 10월 14일, 29살 범인이 피씨방에서 아르바이트생한테 자리를 치워달라고 했는데 화장실을 갔다온 사이에도 안 치워져 있어서 화가 났고, 1,000원 환불을 요구했으나 거부를 당하자, 자신이 무시 당했다는 생각에 스무살인 피씨방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하게 살해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지난 6월 5일 밤 9시 반쯤, 일본의 한 고속도로 상에서 앞에 가는 차를 추월해서 뒤차를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 강제로 세운 다음에 시비를 걸어서, 결국 뒤차에 타고 있던 부부가 그 뒤에서 달려오던 트럭에 치어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이 그렇게 그 부부한테 따진 이유는, 바로 직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오는 길에 범인이 출고 쪽을 막고 차를 세워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방해가 되니까 차를 치우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결국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범인의 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열 받잖아요. 사람인데.”「文句言われて、カチンとくるけん、人間やけん」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 싫은 소리를 들으면 열 받지. 사람인데 안 그래? 여러분도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참고로 저는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도 많이 부족해서 예전에는 참 화도 많이 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싫은 소리 듣고 열 받으면 화를 낸다는 것. 사림이면 당연한 것인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짐승한테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한테 하셨습니다. 짐승은 인내를 모릅니다. 그저 화가 나면 전후 좌우 안 가리고 물어 뜯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그 순간 죄가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위해서요? 아니요.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죄에 넘어가면 큰일 나. 바로 지금, 너를 삼키려고 하는 죄를 네가 다스려야 해! 라고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가인은 무슨 문제로 이렇게 화를 냈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예배에 있어서 화가 났던 것입니다. 교회에 보면 문제가 없나요? 교회가 안전지대인가요? 아닙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도 예전에 여러 교회를 다녀보곤 했습니다만, 맨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배 끝나고 식사를 하려고 하면, 누가 먹기 전에 반찬을 꼭 싸가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건 일본에서도 겪었고 한국에서도 봤고, 미국에 있을 때에도 역시 교회에서 똑 같은 문제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면 또 그걸 가지고 싸워요.

그게 꼭 싸워야 할 일입니까. 조금 양보하고 그냥 웃어넘기면 될 것을 꼭 거기서 싸우고 성질을 부리고 삐지고 안 나오고 그럽니다. 이게 다 죄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야외예배 때 식사기도를 자기 남편한테 안 시켰다고 그렇게 성질을 냅니다. 그게 자기네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이게 그렇게 화를 낼만한 것입니까? 이 분, 믿음이 없는 분 같으세요? 그 분 남편은 장로님이고, 자기는 권사님에다가 방언기도는 또 얼마나 유창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 또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삼키려는 죄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연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모임을 가질 기회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 중에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그 순간이 죄를 다스릴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죄가 문에 엎드려 있지 않아요? 죄가 나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게 좋은 것일까요? 아니요. 어쩌면 그건 안 좋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마귀가 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 아니겠어요? 마귀가 나를 유혹하고 실족하게 하려는 이유는 내가 대단해서입니다. 내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마귀들은 이를 어떻게 해서는 방해하려고 해요. 그런데 아무리 있어도 마귀가 나를 건드리지 않아요? 그건 오히려 기도제목일지도 모릅니다. 내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자존심은 이럴 때 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바로 그 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하, 내 믿음을 내가 주님을 향한 믿음을 마귀가 알고 방해하러 왔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가 나를 원하나 나는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나 나는 마귀를 다스려서 능히 이겨야 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46편 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神はわれらの避け所また力。苦しむときそこにある強き助け。

신명기 28장 7절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主は、あなたに向かい立つ敵どもをあなたの前で敗走させる。彼らは一つの道からあなたを攻めて来るが、あなたの前で七つの道に逃げ去る。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마귀 사탄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도움이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를 삼키려는 죄를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적들을 물리치고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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