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50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홍성필 2021. 6. 3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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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2018년 10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39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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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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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主が喜ばれる挑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도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도전”이라고 하는 뜻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전에 찾아보니까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것.” “비유적으로,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경신 따위에 맞서는 것.”

1 戦いや試合をいどむこと。「挑戦に応じる」「世界チャンピオンに挑戦する」「挑戦状」
2 困難な物事や新しい記録などに立ち向かうこと。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도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좀 너무 흔하게 쓰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두고 모두 “도전”이라고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해보는 일”과 “도전”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모두가 다 도전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도전”은 무엇일까요.

사전에서는 “기록 경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만, 저는 “도전”을 0.01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0.01의 후회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미터 세계 기록들을 보면 그 기록 차이가 0.1초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0.0 몇 초로 세계 신기록이 나오기도 하지요. 이는 세계 신기록만 봤을 때의 일입니다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 해에 치러지는 수많은 100미터 경주를 생각하면 0.1초가 아니라 0.01초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0.01초는 고사하고 1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1초나 2초나 그냥 잠깐, 눈 깜짝할 새……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경기에서는 0.1초가 아니라 0.01초로 희비가 엇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하는 100미터 경주 선수라면 그래도 100미터를 10초 이내에는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경주에서 0.01초라고 하면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단순계산 해 보면 금방 나오지요. 100미터가 10초, 10미터가 1초, 1미터가 0.1초, 그러면 0.01초는 10센티……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10센티, 요만한 길이에요.

여러분, 올림픽에는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그런가요? 단순히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해서 열심히 경기를 해야지요. 더 멀리 날아가야 하고, 더 높이 뛰어 올라야 하고, 더 빠르게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위부터 3위까지는 메달이 주어집니다. 시상대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게 되지요. 0.1초건, 0.01초건, 10센티건 1밀리건 간에 3위 안에 들지 못하면 시상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구경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상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다 똑같나요? 솔직히 은메달과 금메달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금메달,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면, 그 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해도, 그 나라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라 해도 그 큰 경기장에 그 나라 국가가 울려 퍼지고, 선수들과 수많은 관객들이 모두 기립해서 그 나라를 칭송합니다.

하지만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나라들은, 그 나라가 아무리 큰 나라이고 돈이 많은 나라라 하더라도 국기는 올라가지만 국가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2위”와 “3위”이지만, 금메달을 딴 선수는 “우승”입니다. 영어로는 winner 승자라고 하지요. 결국 1등을 한 사람만이 “이긴 자” “승자”라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 스타트 신호가 울려 퍼집니다. 땅! 하고 총소리가 났어요. 10초, 결코 긴 시간은 아니지요. 이제 힘껏 달렸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졌어요. 그 차이가 10센티, 0.01초 차이로 졌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그래도 괜찮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물론 인터뷰 같은 것을 할 때라면 그렇게 대답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10초도 아니고 1초, 아니, 0.01초 차이로 졌거나, 0.01미리 차이로 졌는데도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까요?

글쎄요. 저 같으면 참 많은 후회가 될 것 같습니다. 아……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 순간 힘을 냈다면, 조금만 더 힘을 낼 수만 있었다면 내가 저 시상대 위에 설 수 있었을 텐데, 그 때 그 순간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가장 높은 곳에서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운동선수도 그렇고 수험생들도 그렇겠지요. 예를 들어서 가끔 무슨 “수석합격”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를 할까요. 수석합격……옛날 말로는 장원급제……가 되겠지요. 저는 평생 “수석합격”을 놓쳐본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ㅎㅎ 평생 “수석합격”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ㅎㅎ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려운 시험 같은 경우에는 그냥 합격하기도 어려운데, 수석합격을 할 정도라면 실력이 보통 뛰어난 것은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그 수석합격을 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본래 실력이 있었으니까 다른 수험생들보다 좀 여유롭게 공부를 했을까요?

올림픽 같은 데를 보면 웬만해서는 큰 이변이 없습니다. 몇몇 후보들 중에서 한 병이 우승을 하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은 원래 실력이 있으니까, 다른 선수들보다도 연습이나 훈련을 덜 할까요?

선수들을 보더라도 수험생들을 보더라도 아무리 실력이 있고 아무리 메달이나 합격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왜요? 예, 0.01의 후회를 알기 때문입니다. 0.01점 차이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0.01초, 0.01미리, 0.01점 차이로 내가 큰 영광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0.01초, 0.01미리, 0.01점 차이로 그 동안 내가 해왔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도전인 것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 교회가 있는 시부카와시 주변에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눌러서 말씀을 전하고 전도지를 드리고 했습니다만, 요즘은 좀 방법을 바꾸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초인종을 눌러서 그 사람이 나왔을 때, 이카호중앙교회에서 나왔다고 하면 전도지를 아예 안 받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됐대요. 괜찮대요. 그러면 우체통에 넣을 수도 없고 그냥 빈손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우체통에 넣어두기만 합니다. 물론 슬쩍 보고 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믿음이 있습니다.


1866년에 조선으로 온 선교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름은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런던선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그가 탄 배가 평양에 상륙하려고 하자 조선은 그 배를 공격했습니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체포되어 결국 조선에서 제대로 말씀을 전해보지도 못한 채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27살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는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가 순교하기 직전에 자신을 처형시킬 박춘권에게 책 몇 권을 건네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그 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박영식이라는 사람한테 그 책을 나누어주었다고 하는데, 그는 책을 뜯어서 벽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그 방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뭐겠어요. 그 방에 머무는 사람은 그냥 무심코 벽지에 적힌 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이 그 마음 안에 박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조선에서 첫 장로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받은 한문성경을 벽지로 도배했던 박영식은 조선 최초 교회인 널다리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훗날에 장대현교회가 되어, 1900년도 초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처럼 놀랍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제가 나누어드린 종이에 제 말과 제 글이 적혀 있었다면, 그걸 버리면 아까운 마음도 들겠으나, 거기에는 주님의 말씀이 적혀 있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설령 그걸 그 사람이 지금 읽지 않는다고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읽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읽고 은혜를 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하다못해 그 종이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 보고 주님을 알게 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집 앞에 나와 있는 분이 계세요. 그럼 말을 건넵니다. 저기 이카호중앙교회에서 나왔습니다……그러면서 전도지를 드리지요.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참 친절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수고가 많으시네요……라고 하면서, 자기는 괜찮다는 거예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참 알고 보면 이 “괜찮다”는 말은 대단히 무서운 말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사고 소식이 나요. 예를 들어서 음주운전사고를 보면 어떻습니까.

음주운전이나 과속운전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보통 초보운전자가 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운전경력 몇 년, 몇 십 년은 된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고가 날 줄 알고 음주운전을 했나요? 아니요. 대부분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운전을 하루 이틀 한 줄 알아?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고가 납니다. 그러면 본인 인생만이 아니라 본인의 가족, 그리고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생까지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해요? 예,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괜찮다는 생각은 교회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이 괜찮다는 생각이 더욱 무섭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私たちはみな、善であれ悪であれ、それぞれ肉体においてした行い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ために、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の前に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히브리서 9장 27절~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キリストも、多くの人の罪を負うために一度ご自分を献げ、二度目には、罪を負うためではなく、ご自分を待ち望んでいる人々の救いのために現れてくださいます。

여기에는 안 믿는 사람만 심판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세상에는, 특히 교회에는 “괜찮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 번 믿으면 우리는 괜찮대요. 지옥에 가지 않는대요. 구원은 사라지지 않는대요.

그렇다면 한 번 믿는다는 게 언제입니까. 주기도문을 외우면 된 건가요? 세례를 받으면 된 건가요? 아니면 직분을 받으면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인가요?

시간관계상 몇 구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30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이는 주인한테서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놓은 종한테 주인이 한 말입니다. 이 당사자는 주인의 종이었습니다.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종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빼앗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빼앗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번은 주어졌다가 잃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에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ヨハネの黙示録 3章11節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かんむり)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네가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이미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도 봅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ヨハネの黙示録 2章4節~5節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だから、どこから落 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しょくだい)をその場所から 取り除く。

이는 일부에 불과합니다만, 성경에 이처럼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시나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더라도 구원은 받았다는 것인가요? 면류관을 빼앗겨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내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인가요?

사실 제가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 작년 이맘때쯤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기독교 라디오 방송사로부터 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제 설교를 자신들의 한국어 방송에서 사용하고 싶다고 하면서, 제게 방송사용허가와 8개 교리질의에 답하라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구원을 잃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이러이러해서 구원은 잃을 수가 있다고 답변했더니만, 그 부분이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아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제가 먼저 사용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먼저 얘기를 해놓고는 안 하겠다고 하니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만, 그 교단이라고 하는 것이 군소교단도 아니고 미국에서 제일 큰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주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성경에 입각한 믿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늦게나마 이 구원의 취소에 대해서 새삼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절대로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의 글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를 보더라도 한 번 얻어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참 여러 가지로 놀랐습니다. 일단 제 공부부족이죠. 이와 같은 사실, 현재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단에서 구원의 취소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더라도 구원은 받았다는 것인가요? 면류관을 빼앗겨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내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신앙인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 교회 재산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배를 불리게 하는 일을 저질러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목회자가 돈 문제, 여성 문제를 일으키고 해도, 다른 사람의 학위 논문을 베끼거나 해도 면류관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정말 괜찮다는 건가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문제, 세상보다도 훨씬 깨끗해야 한다는 교회 안에서, 교단 안에서도 오히려 세상보다도 더욱 부끄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직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지금 현재까지는 아무리 성경을 살펴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0.01초, 0.01점, 0.01미리 차이로 영광을 얻을 수도, 승리를 얻을 수도 있으나, 0.01초, 0.01점, 0.01미리 차이로 영광을 잃을 수도, 패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ピリピ人への手紙 3章14節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이 글을 읽고 이런 생각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그냥 걸어가면 되지, 왜 달려가야 해요? 똑 같은 질문을 100미터 선수한테 물어보세요. 그냥 골라인까지 걸어가면되지 왜 힘들게 달려가냐고 말이에요.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1章12節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침노한다는 것은 대단히 심하게 공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을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얻기 위해서, 천국을 차지하지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빼앗는다고, 침노해야 빼앗는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천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걸어가지 않고 왜 힘들게 달려가냐구요? 예, 빼앗길지도 모르니까,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천국을 빼앗기 위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4년 만에 한번 열리는 올림픽, 흔히들 여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4년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지요. 4년만 준비해서 올림픽에 나갈 수가 있습니까. 저도 한 번 해볼까요? ㅎㅎ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 선수들은 평생을 준비했습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힘이 안 들어요? 쉬고 싶지 않아요? 놀고 싶지 않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하루하루가 즐겁겠어요? 아무리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도 한 두 번이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왜 쉬고 싶거나 놀로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순간을 인내함으로 받을 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3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10章 35節~39節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確信を投げ捨ててはいけません。その確信には大きな報いがあります。
あなたがたが神のみこころを行って、約束のものを手に入れるために必要なのは、忍耐です。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わたしの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もし恐れ退くなら、わたしの心は彼を喜ばない。」
しかし私たちは、恐れ退いて滅びる者ではなく、信じていのちを保つ者です。」

우리는 인내함으로 받을 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후에 약속하신 큰 상을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가 뒤로 물러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순간 힘들다고 물러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종살이에서 벗어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 힘들다고 다시 종살이를 하겠다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잠언 26장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힘들다고 해서 믿음을 버린다는 일은 이처럼 미련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6장 6절~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6節~7節
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힘들다고 해서 뒤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은,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없었던 것으로 치자는 말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보혈을 모욕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괜찮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충분하십니까? 아니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욱 힘써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0.01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문턱 앞에서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의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힘써 천국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서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큰 상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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