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47회 우리들의 회복

홍성필 2021. 6. 3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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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회 우리들의 회복
2018년 9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 5절~10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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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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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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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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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회복” 私たちの回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회사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는데, 직원들끼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사투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강원도 사투리는 다 남 얘기라는 것입니다.

저희 가족이나 친척 분들은 대부분 서울이나 경기도 쪽이었기 때문에 사투리에 대한 부분은 좀 약합니다. 물론 학교를 다닐 때도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있긴 했습니다만, 사투리를 쓰는 친구들은 호남이나 영남 출신이 대부분이라서 “강원도 사투리”는 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니, 강원도 사투리가 모두 남 얘기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 분이 이럽니다.

너 몇 학년이니? 라고 물으면 강원도 애들은 “4학년이래요” 라고 한다는 거예요. 너 고향은 어디니, 라고 물으면 “강원도래요” 라고 하면서, 이 사투리를 모르면 다 자기 말이 아니라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참 작은 나라기인 합니다만 역사가 깊기 때문에 이처럼 지역마다 다양한 사투리가 있어서 참 흥미롭습니다.

가끔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을 듣습니다. 이게 참 도움이 많이 됩니다. 무엇보다 일본식 성경 명사나 말투에 도움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살면서 교회에 다니긴 했습니다만, 모두 한국인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어 예배는 드려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한국어 성경만 읽고 그러다 보니 일본어 성경에는 좀 약한 편이지요.

물론 고유명사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발음이 비슷하지만 간혹 틀린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가룟 유다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イスカリオテのユダ라고 하지요.

얼마 전에도 그 일본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이 분의 말씀 중에서 “제카리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도대체 누굴까. 사가랴인가? 그런데 그러면 이 분의 말이 안 맞아요.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아하, 알았어요.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스가랴”입니다. 이처럼 <스가랴>는 “제카리아”고, 참고로 사가랴는 “자카리야”입니다. 이처럼 참 많은 도움도 됩니다만, 간혹 듣다가 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의외로 많습니다.

얼마 전에 듣던 내용은 에스겔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만, 오늘 말씀, 사실 에스겔 서가 선지서이다보니 난해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그래도 유명한 편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른바 마른뼈에 관한 환상이지요.

에스겔 3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데려가셨는지, 아니면 꿈속에서 데려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골짜기(平地(谷間)の真ん中)로 데려가셨다고 하는데, 거기에 보니 사람의 뼈들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냥 뼈들이 아니라 2절에 보면 아주 말라 비틀어진(すっかり干からびていた) 뼈들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7장 4절~6절을 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主は私に言われた。「これらの骨に預言せよ。『干からびた骨よ、主のことばを聞け。
神である主はこれらの骨にこう言う。見よ。わたしがおまえたちに息を吹き入れるので、おまえたちは生き返る。
わたしはおまえたちに筋をつけ、肉を生じさせ、皮膚でおおい、おまえたちのうちに息を与え、おまえたちは生き返る。そのとき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저 말라 비틀어진 뼈들한테 전하라. 너희들이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렇게 말을 했더니 어떻게 되었더랍니까.

에스겔 37장 7절~8절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私は命じられたように預言した。私が預言していると、なんと、ガラガラと音がして、骨と骨とが互いにつながった。
私が見ていると、なんと、その上に筋がつき、肉が生じ、皮膚がその上をすっかりおおった。しかし、その中に息はなかった。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른 뼈들한테 전하자 바싹 마른 뼈들이 딸가닥 딸가닥 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로 맞아 연결되어갑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여서 사람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떻습니까. 무슨 할리우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짧은 구절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와 같은 풍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글이 지금으로부터 2600년이나 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력이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고 있던 그 일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고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건국되었지만 아직 이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 성취되느냐.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 이스라엘이 회복됨으로 인해서 성취된다. 이제 이스라엘에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다, 바로 주님의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은 이스라엘을 참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의 말씀을 잘 들어보면 <이방인>이라는 말씀을 쓰시는데, 종종 보면 이를 어떤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만,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방인>이라는 말을 쓴다면 한국 사람이나 일본사람들 모두가 포함되고 맙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까. 아닙니까.

어려우신가요?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면 다른 이론이나 주장은 필요 없습니다. 성경을 펴보면 되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3장 6절~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ですから、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こそアブラハムの子である、と知りなさい。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까, 아닙니까.

예, 우리는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 적힌 그대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이 오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バビロンの王ネブカドネツァル) 왕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시기에 적힌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모두 망했다고 낙담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적힌 글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유대인의 역사이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적힌 이 글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그 시기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인가요? 다시 말에서, 이 글은 여전히 이스라엘 만을 위해서 쓰인 글이라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그야말로 남 애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이야기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말 그대로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 이방인은 옆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하고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어쩌다가 어떤 목사님 한 사람이 한 말을 가지고 주일 예배 시간 때에 꼭 장황하게 말을 해야 할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일본에서 오신 어떤 독실한 기독교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일본에서 미국까지 신학을 공부하러 오신 분이신데 얼마나 믿음이 좋으신 분이셨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당시 제게 했던 말 중에,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세계 각처에서 학대 받고 있는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 언약을 저한테 말을 하더라구요.

아브라함의 언약 중에서 창세기 12장 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이 축복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한테 잘해주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축복 받는 방법을 알았어요. 우선 우리 주변에 유대인이 어디 사는지를 알아봐야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어떤 도움을 졸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는 열과 성을 다해서 유대인들을 모시고 삽시다. 이 사람 말 대로라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받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구약이라 하더라도 성경말씀이 이스라엘 사람들 만을 위한 역사가 적혀있는 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나라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우리나라 역사, 태정태세문단세나 공부하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라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신을 믿어서 뭐하겠습니까.

지금 이 일본, 그렇게 미션스쿨도 많고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순교하신 분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1549년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고 뛰어난 신학자들도 많이 배출한 일본에는 왜 아직도 신교구교 모두 합해도 전 인구의 1%도 안 되는 것인가.

그리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부흥을 일구어낸 한국, 세계적인 교회가 많이 세워졌고 세계적인 목회자도 많이 배출한 한국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건 뭐 목사를 믿는 건지 하나님을 믿는 건지 모릅니다. 성적인 추문, 돈 문제, 권력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참, 남 보기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전도를 해 봤자 사람들이 뭐라 그렇겠어요. “니들이나 잘해”라고 하고 말지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예수님이 가짜인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모두 전설에 불과한, 그냥 꾸며낸 이야기인가요?

하나님도 가짜고 예수님도 가짜라면 성경 말씀도 가짜입니다. 이는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루 빨리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해주시고 인도해주신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야말로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고, 바로 나를 위해서 주신 이는 라고 믿은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갔습니다. 거기 의사는 정말 훌륭한 의사라서 못 고치는 병이 없습니다. 자, 그 의사가 진찰을 하고 약을 처방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병이 나아야겠습니까. 안 나아야겠습니까. 당연히 나아야겠지요. 정말 훌륭한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나았는데 한 사람만 안 나았어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대로 의사가 말한 대로 약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먹으라고 한 약을 한 번 먹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한 번 먹으라고 한 약을 세 번이나 먹었다거나, 더 심하게 말하면 몸에 바르라고 한 약을 먹었다거나 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복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어디에서 목사가 귀신을 쫓다가 사람이 죽었다……그런 기사를 여러분께서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아니면 무슨 어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더니만 가정이 파탄 나고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입니까?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입니다. 성경도 진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믿음이 이상해져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올바로 서지 않아서인 것입니다.

성경은 저 멀리 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사람들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환자가 병원을 찾습니다. 그러면 병원에서 진찰을 해주고 약을 처방해주지요. 그런데 사람이 거의 다 죽어가요. 그러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죽었어요. 아니,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시신이 완전히 썩어서 뼈가 되었어요. 그것도 그냥 뼈래요? 2절에 보니까 아주 말라 비틀어진 뼈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백 보 양보를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가 세상에도 가끔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백골이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는 무슨 공포영화 수준이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좀비 같은 영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나라가 망하고 모든 사람들이 포로로 남의 나라에 끌려갔습니다. 이제 내 인생도 끝났다, 내 나라도 완전히 망했다. 모든 가망성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한 가닥 희망도 사라지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냥 뼈도 아닌 마른 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일으킬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사로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침대에 누워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나요? 지금 막 숨을 거뒀나요? 아니요. 나사로는 이미 죽고 그의 시신은 무덤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로 막힌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 다가가셔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死んだラザロの姉妹マルタは言った。「主よ、もう臭くなっています。四日になりますから。」

죽은 지 4일이나 지나서 이미 그 몸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냄새가 나요. 하면서 누이 마르다는 어쩌면 울면서 예수님을 말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4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4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そ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ラザロよ、出て来なさい。」
すると、死んでいた人が、手と足を長い布で巻かれたまま出て来た。彼の顔は布で包まれていた。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ほどいてやって、帰らせなさい。」


주님은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썩어가던 뼈와 살들이 회복됩니다. 영혼이 그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염을 한 상태였을 텐데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남 얘기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 회복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회복 이야기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소망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기대도 해봅니다. 소원도 빌어봅니다. 하지만 소망이 끊어지고 속수무책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단념합니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 때, 소망은커녕 뼈도 아주 마른 뼈가 되고 말았을 때, 세상적인 희망이 사라지고 썩은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 때는 땅바닥을 바라보며 낙담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인 것입니다. 포기할 때가 아니라 회복할 때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단순히 한 두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7장 10절을 봅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私が命じられたとおりに預言すると、息が彼らの中に入った。そして彼らは生き返り、自分の足で立った。非常に大きな集団であった。

살아난 그 모습을 보니 군대, 그것도 지극히 큰 군대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인간적인 소망이 끊기고 좌절과 절망이 밀려올 때, 그 때는 포기할 때가 아니라 지극히 큰 군대로 일어설 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만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회복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마른 뼈가 살아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지극히 큰 군대, 믿음의 용사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서, 지극히 큰 군대, 믿음의 큰 용사로서 회복되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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