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26회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

홍성필 2021. 6. 29.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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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회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
2018년 5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2절~4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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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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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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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 主の愛がとどまる場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일본은 연호가 헤이세이입니다. 1989년이 헤이세이 1년, 일본에서는 헤이세이 원년이라고 하죠. 그래서 올해 2018년은 헤이세이 30년이고, 내년에는 지금 천황이 은퇴를 한다고 합니다. 그럼 아마도 이 연호도 또 바뀌고 할 텐데, 벌써부터 연호가 무엇으로 될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천황은 30년간 재위를 했습니다만, 지금 천황 아버지인 쇼와천황은 64년이나 했었습니다. 지금 천황은 거의 60이 되어서 즉위를 했지만 쇼와천황은 서른도 안 되어서 천황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오래 살기도 했지요. 만 87살까지 살았습니다.

쇼와 시대는 참 격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26년부터 쇼와가 시작되었습니다만, 당시는 그야말로 대일본제국, 조선을 포함해서 상당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1942년 12월에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고, 1945년 8월에 패전을 함으로 인해서 그 동안 가지고 있든 식민지 등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1964년 동경 올림픽, 1980년대에서까지 이어지는 고도경제성장으로 인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지요. 이른바 쇼와시대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쇼와천황은 본래부터 생물학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만, 이 천황에 관해서 전해져 오는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여름에 천황이 여름 휴가 차, 본래 살던 동경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의 일인데, 천황이 사는 궁성에 직원들이 보니까 그 넓은 마당에 잡초들이 너무 많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기 전에 그 풀들을 좀 뽑아서 깨끗하게 해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풀들을 뽑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천황이 돌아올 때까지 넓은 곳에 무성하게 난 풀들을 다 뽑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직원들 중에서 책임자인 시종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천황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잡초가 너무 많이 나 있어서,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만,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습니다. 바로 깨끗하게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真に恐れ入りますが、雑草が生い茂っておりまして随分手を尽くしたのですがこれだけ残ってしまいました。いずれきれいに致しますから」

그랬더니 평소에는 온화했던 이 쇼와천황이 그 시종장한테 엄한 말투로 이랬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이 세상에 잡초라고 하는 풀은 없어요. 어느 풀에든 이름이 있습니다. 어느 식물이든지 이름이 있어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골라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를 자르면 안 됩니다.”

「何を言っているんですか。雑草という草はないんですよ。どの草にも名前はあるんです。どの植物にも名前があって、それぞれ自分の好きな場所を選んで生を営んでいるんです。人間の一方的な考えで、これを切って掃除してはいけませんよ」

이 말을 보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 모든 식물들한테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한테 유익하면 약초다 채소다 라고 하거나, 하다못해 꽃이라도 있어서 보기가 좋으면 화초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한테 별로 유익하지가 않아요. 그러면 그건 뭐예요? 예, 잡초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기준은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이 사람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는 게 알고 보면 얼마나 허술한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아구찜 같은 것 좋아하시나요? 수산시장 같은 곳에서 보면 아구가 얼마나 못 생겼습니까. 옛날에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다가 그게 잡히면 버렸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때요? 그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 때문에 아구는 이제 고급생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사람들 편의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기준은 어떻습니까.

이사야 5장 16절을 봅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しかし、万軍の主は、さばきによって高くなり、聖なる神は正義によって、みずから聖なることを示される。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 <공의롭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공평하고 의롭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나 다툼이 발생하면, 물론 대화로 서로 잘 풀면 좋겠습니다만, 간혹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법원의 판단을 구합니다. 하지만 법원에 있는 판사들의 판단이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니요. 공부를 많이 하고 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모든 판단을 항상 올바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3번,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이렇게 세 번을 받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지요.

하지만 세 번이 아니라 30번을 받을 수 있게 해놓는다 하더라도 100%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가끔은 불행하게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판단이 바뀌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조직에 있어서 건전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벌규정이 객관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서로 다른 사람이 동등하게 좋은 성과를 냈는데, 사장 마음대로 한 쪽은 지난 추석에 아주 좋은 선물을 보내주었으니까 승진을 시켜 주고, 다른 한쪽은 추석 때 시시한 걸 보내왔으니까 승진을 안 시켜준다거나 한다면 그 조직은 건전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이는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나 조직이 건전하지 않게 되면 성장도 못하고, 성장도 못한다면 좋은 인재들은 다 빠져나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판단,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기준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어떠한 변함이 없습니다. 아침에 생각해보니까 죄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있다 생각해보니까, 아, 이 놈이 나쁜 놈 같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벌을 내려야겠다……이러신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까 생각에는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축복을 줘도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축복을 줘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때로는 불평등할 때가 있습니다. 상사에 따라서, 거래처에 따라서, 판단기준이 바뀌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생활 해본 분들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A가 많고 B가 적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장이 A가 적고 B가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예, 둘 중 하나죠. 사장 판단을 따르든지 아니면 회사를 나오든지 아니겠습니까. 물론 내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고, 사장 판단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항상 꼭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변함도 없으십니다. 언제나 그 판단은 선하시며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공평하다고 한다면 저울을 떠올릴 수가 있겠지요. 천칭이라고 하지요? 좌우에 물건을 올려놓고, 무게가 똑같으면 수평을 유지하지만 한쪽이 무거우면 이렇게 기울어집니다. 이른바 <법>이라고 하면 이 저울 마크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법이라고 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자주 쓰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슨 법의 여신이다……라고 하면 이 저울을 들고 있고요, 한국이나 일본의 변호사 배지를 보면 거기에도 역시 이 천칭 저울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래도 경찰에 잡혀갈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군마에도 마에바시에 보면 교도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 근처를 자전거로 지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거기 안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가 물론 경찰에 잡혀갈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리 선하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정말 그래요? 교도소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그래도 좀 나은가요?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교도소는 나쁜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니요.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십시오. 운전을 하다가 앞만 보면서 가요? 좌우도 보잖아요? 물론 자동차가 오는지, 사람이 지나는지도 봅니다만, 꼭 안전확인만을 위해서 좌우를 봐요?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가다가 보면 어? 저기 저런 가게도 있었나? 어? 저기 세일하네? 뭐 그러면서 볼 수도 있습니다. 운전하면서 그런 걸 보는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는 안 해봤어요? 아니요. 다 해봤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내가 운전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린 그 순간, 내 차 앞으로 애들이 뛰어나오거나 자전거가 갑자기 뛰쳐나왔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다가 일이 심각하게 됐어요? 이는 그럼 경찰에 잡혀갑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까딱 잘못하면 언제든지 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꼭 무슨 교도소에 끌려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좀 그렇지만, 우리가 남들을 비판하거나 할 때에 보면, 그 사람들이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만 그런가요? 아니요.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비난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놓인 저울에 올려놓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 우리의 행실을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더 깨끗하다. 훨씬 더 믿음이 좋다. 훨씬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11절~15절을 봅니다. 여기 보면 저울이 아니라 더 기가 막힌 방법으로 우리를 판단하신다고 바울은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15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というのは、だれも、すでに据えられている土台のほかに、ほかの物を据え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す。その土台とはイエス・キリストです。
もし、だれかがこの土台の上に、金、銀、宝石、木、草、わらなどで建てるなら、
各人の働きは明瞭になります。その日がそれを明らかにするのです。というのは、その日は火とともに現れ、この火がその力で各人の働きの真価をためすからです。
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残れば、その人は報いを受けます。
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焼ければ、その人は損害を受けますが、自分自身は、火の中をくぐるようにして助かります。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공적이 아무리 뜨거운 불로 태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면 상을 받고, 공적이 사라지면 해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이, 우리의 의로움이 어느 정도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もしあなたがたの義が、律法学者やパリサイ人の義にまさるものでないなら、あなたがたは決して天の御国に、入れません。

이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유명한 목사님, 대형교회 목사님, 존경 받는 목사님이라면 몇몇 목사님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 분들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이걸 어쩌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세요? 절망적이에요? 에이, 뭐야. 그럼 천국에 가기 글렀잖아. 진작 말을 하지…….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절망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을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나아요. 경찰에 잡혀가지도 않았고, 저기 형무소 높은 담벼락 안에 들어가 있지도 않아요.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제가 좀 키가 큽니다. 키가 186정도 됩니다. 몸무게가 아니라 키가 186센티에요. 크죠? 예, 여러분께서는 키가 어느 정도 되십니까. 150? 160? 아니면 170 정도 되십니까?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을 보고, 에게……그게 키에요? 저는 여러분들보다 키가 크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는 좀 더 안전합니다……. 뭐 그럴 수 있지 않겠어요? 예를 들어서 3~4미터인 곳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매달려서 내려오면 160센티 정도 되는 분에 비해, 저는 186이니까 26센티 정도 더 바닥에 가까울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비교적 좀 더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이러면서, 아~ 저는 여러분보다 키가 더 크니까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안 다칠 자신이 있습니다……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높을 필요도 없어요. 건물 5층 높이에서 무방비하게 떨어진다면, 여러분은 다치고, 키가 큰 저는 안 다칩니까. 아뇨. 똑같이 다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의롭습니까. 우리가 교도소 담벼락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의롭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 아주 얄미운 이웃들보다 더 의롭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제가 키 몇 센티 더 크다고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저만 안 다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전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세상에 속상한 일들이 많습니까. 답답한 일들이 많습니까. 열 받는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분들께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드립니다. 금식해보십시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3일이 제일 힘들대요. 그런데 3일 지나면 조금 나아지고 5일이 좀 더 힘든데 5일이 지나면 또 조금 나아진대요. 물론 그러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경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며칠까지 해봤다고 말씀 드리면 이것도 교만이 될 것 같아서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만, 아휴, 이건 뭐 가면 갈수록 태산이에요.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배고프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허기가 집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금식을 하면 기도의 능력이 쌓이고 믿음이 쌓인다고 해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를 잘못 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어떤 글에 의하면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그 중 하나가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그 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금식은 그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하루 굶어보세요. 그리고 이틀 굶어보세요. 그러면 적어도 시기가 사라집니다. 질투가 사라집니다. 미움이 사라집니다. 답답함이 사라집니다. 왜요? 예, 너무 배가 고프거든요. 내가 지금 배가 고픈데, 질투가 문제예요? 시기가 문제예요? 미움이 문제예요. 그저 밥 한 숟가락만 먹었으면 좋겠어요. 빵 한 조각만 먹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모든 문제가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우리 대부분의 문제는요, 우리가 너무 우리 주제를 몰라서 그런 것일 수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여당이나 야당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자기들이 잘났대요. 다 상대방이 못한대요. 또 그런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정치인들을 보고 욕합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그 사람들보다 나아요?

어제 뉴스를 토니까 어느 정치인이 단식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국회 앞에 텐트 쳐놓고 돗자리 깔아놓고 그러던데, 제가 말씀 드리는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또는 아무도 눈치 채지 않게 금식 한 번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안 보였던 것이 보입니다.

요즘 뭐 미투다 뭐다 해서 곤욕을 치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시는 참 좋습니다. 고은 씨의 시집 <순간의 꽃>에 담긴 짧은 시입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들어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기를 쓰고 내세울 때에는 안보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선거 판에서 싸우는데, 상대방이 가진 꽃, 상대방한테 피어있는 좋은 꽃이 보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깎아 내려야죠.

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물러나오면, 내가 한 발자국 내려 앉으면 그 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사야 42장 2절~4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彼は叫ばず、声をあげず、ちまたにその声を聞かせない。
彼はいたんだ葦を折ることもなく、くすぶる燈心を消すこともなく、まことをもって公義をもたらす。
彼は衰えず、くじけない。ついには、地に公義を打ち立てる。島々も、そのおしえを待ち望む。

이는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불에 태워도 남을 공적은 고사하고, 꺼져가는 등불이나 상한 갈대일지 모릅니다. 나도 그렇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작년 2017년 12월 기준으로 세계인구가 76억 명이라고 합니다. 참 많죠? 그렇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될까요? 1프로요? ㅎㅎ 1프로라 한다 하더라도 7천 6백만명인데, 남북한 합한 수보다도 많습니다. 0.1프로? 7백60만명? 0.01프로? 76만명? 0.001프로? 7만6천명? 좀 더 해볼까요? 0.0001프로? 7천6백명?

어떠세요? 연예인이나 무슨 유명인사가 아닌 담에야,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7천6백명이 아니라 기껏해야 몇 백병 정도 아니겠어요? 전세계 인구 중에서 0.0001프로도 모르는 풀? 그건 세상적으로 본다면 잡초입니다. 잡초 중에서도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잡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잡초 중의 잡초일 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잡초의 상한 가지도 꺾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 이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주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인도해주시는 주님,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병든 사람이 낫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이런 나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시고, 나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마어마한 기적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답해요? 속상해요? 열 받아요? 자존심 상해요? 불안해요? 걱정되세요?

정말 언제 죽어도 하나님한테 있어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나에게 오늘 아침에 깨어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오늘도 이 작은 심장을 뛰게 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작은 우리 마음이야말로 주님의 축복이 머무는 곳이요,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나를 감싸주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정도로 낮아져 주셨는데,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우리가 낮아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조금 낮아지면 그 동안 안 보였던 이웃이 보입니다. 그 동안 나라고 하는 존재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우리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 마음 속에도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상한 가지와도 같은 나도 꺾지 않으시고, 이처럼 못난 꺼져가는 작은 등불 같은 나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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