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83회 우리가 드리는 찬송과 예배

홍성필 2021. 6. 2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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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회 우리가 드리는 찬송과 예배
2017년 6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2절~25절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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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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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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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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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드리는 찬송과 예배”私たちが捧げる讃美と礼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입니다. 바울은 총 3차에 걸쳐서 전도여행을 했는데, 지금은 두 번째로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수리아에서 시작한 2차 전도여행은 길리기아,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갈라디아, 무시아로 갔습니다. 무시아라고 하는 곳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터키 서북부 지방을 가리킵니다. 여기까지 온 바울의 코스를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계속 왔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무시아였는데, 여기서 사도행전 16장 7절~8절을 잠시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こうしてムシヤに面した所に来たとき、ビテニヤのほうに行こうとしたが、イエスの御霊 がそれをお許しにならなかった。それでムシヤを通って、トロアスに下った。

이 비두니아라고 하는 곳은 바울이 있던 곳에서 본다면 북동쪽 방향입니다. 그러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왔다가 이제 북동으로 발길을 돌려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마침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어떻게 막았을까요.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칼을 들고서 가지 못하도록 막아 섰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사정이 생겨서, 아무리 가려고 해도 갈 수 없게 되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만, 동쪽에서 계속 서쪽을 향해서 왔는데, 북동쪽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계속 서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결국 도착한 곳이 어디냐 하면 드로아로 왔는데, 드로아는 지금으로 본다면 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계속 서쪽으로 오다가 이제 아주 끝까지 와버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바울이 그날 밤 환상을 봅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10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ある夜、パウロは幻を見た。ひとりのマケドニヤ人が彼の前に立って、「マケドニヤに渡って来 て、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と懇願するのであった。パウロがこの幻を見たとき、私たちはただちにマケドニヤに出かけることにした。神が私たちを招いて、彼らに福音を宣べさせるのだ、と確信したからである。

여기서 당시 마게도냐라고 하면 지금 그리스 지역입니다.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머물고 있던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서 또 계속해서 서쪽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런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뿐입니다.


그들은 이제 바다를 건너 사모드라게, 네압볼리를 지나 마침내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바울 일행이 건너게 된 에게해, 이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 지방으로 오게 됨으로 인하여 이제 아시아를 벗어나 주님의 복음이 유럽 전 지역으로 퍼지게 되는 놀라운 계기가 된 역사적인 한발자국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 지방 빌립보에 도착해서 지내는 중에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6장 16절,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私たちが祈り場に行く途中、占いの霊につかれた若い女奴隷に出会った。この女は占いをして、主人たちに多くの利益を得させている者であった。


기도하러 가는 길에 바울이 보니까, 어떤 여종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종이 알고 보니 그냥 여종이 아니에요. 어떤 여종이냐 하면, 말하자면 귀신 들린 여종, 그러니까 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무당 여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당 여종은 자기에게 씐 귀신의 능력으로 주인들이 돈을 벌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말씀을 듣고 혹하시는 분 계십니까?

재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재물이 아닙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 사탄도 재물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마귀 사탄에게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타락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마태복음 4장 8절~9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今度は悪魔は、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 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国々とその栄華を見せて、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全部あなたに差し上げましょう。」

마귀가 이런 것이 예수님을 사랑해서였겠습니까? 아니요. 넘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5장 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金銭を愛する者は金銭に満足しない。富を愛する者は収益に満足しない。これもまた、むなしい。

마귀가 주는 재물은 축복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결국 사람을 죽이고 마는 소금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은 어떻습니까.


잠언 10장 22절,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主の祝福そのものが人を富ませ、人の苦労は何もそれに加えな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이 진짜 재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진짜 축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자, 이 귀신들린 무당 여종, 자신의 주인들에게 사악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소금물과도 같은 돈을 벌게 해주었던 무당 여종이 바울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했다고 해요?

17절~18절을 보니,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彼女はパウロと私たちのあとについて来て、「この人たちは、いと高き神のしもべたちで、救いの道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る人たちです。」と叫 び続けた。幾日もこんなことをするので、困り果てたパウロは、振り返ってその霊 に、「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命じる。この女から出て行け。」と言った。すると即座に、霊は出て行った。

이 요망한 귀신이 바울 일행을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르는데, 그 하는 말을 들으니까 뭐라고 하냐 하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도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아봤어요? 예, 마귀들은 알아보았습니다. 이 바울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마귀들은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공격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과 그 일행들을 칭찬했다고 해요. 사실 마귀가 한 말이 틀렸나요? 아니요.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한 글자도 틀린 데가 없어요.

그렇다면 마귀도 그들을 도우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었던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추켜세운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이야 자기들도 바울을 공격하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아주 혼을 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해요?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 앞길을 예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계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계셨습니다. 어디 지저분한 영이 감히 덤빌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추켜세웁니다. 제발 그냥 날 이대로 내버려달라고 아부를 떠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주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한테 있어서 마귀가 칭찬을 해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요. 성경에 보니까 이런 거슬리는 칭찬을 하루나 이틀도 아닌 여러 날을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함께 하는 바울에게는 영적으로 대단히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 귀신한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라고 명했더니 즉시 그 귀신이 도망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어납니다. 이제 무당한테서 귀신이 나갔으니,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난 게 누구냐 하면, 그 귀신으로 말미암아 돈을 벌였던 여종의 주인들이었겠지요? 그래서 이것저것 되지도 않는 누명을 씌어서 바울과 실라를 끌고 가서 관리들한테 넘겨줍니다. 귀신들의 능력으로 돈도 많이 벌었을 것이고 그랬으니 권력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끌고 가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다짜고짜 옷을 찢더니 매로 많이 친 다음에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의 몰골을 생각해보세요. 어땠을까요? 옷을 찢었다고 하니 입고 있는 것은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을 것이고, 어디 그뿐이었겠어요? 매도 많이 맞았다고 하니까 여기저기가 피멍이 들고 온몸에는 상처가 나서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겠습니까. 거기에다 깊은 곳에 갇혔다고 하니 공기는 탁하고, 곰팡이 냄새 땀냄새가 진동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도망갈 수도 없도록 두 발의 말목은 족쇄에 매였습니다.

이보다 딱한 꼴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이제 마주보고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글쎄요. 제가 실라였다면, 어땠을까요.

바울 선생님,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정말 맞는 것일까요?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정말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게 맞는 걸까요? 그냥 어떻게 해서든 당초 예정대로 비두니아로 갔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괜히 마게도냐로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거잖아요? 거 환상을 보셨다고 했는데 그거 정말 맞는 거예요?

뭐, 이러면서…ㅎㅎ.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불평 불만을 토로할 만한 게 어디 한 둘이에요? 글쎄요. 적어도 저 같으면 직접 바울한테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뭘 했다고 해요? 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정말 괴로울 때는요, 기도도 안 나옵니다. 찬송도 안 나와요. 그럼 뭐가 나와요? 예,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누더기 옷을 걸치고 상처투성이에 두 발은 묶인 상태에서 지칠 대로 지친 바울과 실라는 한숨이나 신세타령이 아니라 기도와 찬송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믿음의 용사입니까.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기록은 바로 그 뒤에 적힌 글이지요?

16장 25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真夜中ごろ、パウロとシラスが神に祈りつつ賛美の歌を歌っていると、ほかの囚人たちも聞き入っていた。

저희 가족이 예수를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예를 들어서 식당 같은 데에서 기도를 하는 게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식당에서 기도하고 있으면, 거 괜히 티 내고 그러는 것 같아서 별로 좋게 보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가족끼리 식당 같은 곳에서 식사하기 전에 기도할 때에는 그냥 각자 조용히 기도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가요? 지금이 무슨 예수 믿는다고 들키면 잡혀가는 세상도 아닌데, 남들이 나를 흉 볼까봐 남들 눈치를 보면서 기도하고 그래야 하는 건가요?

누가복음 9장 26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もしだれでも、わたしとわたしのことばとを恥と思うなら、人の子も、自分と父と聖なる御使いとの栄光を帯びて来るときには、そのような人のことを恥とします。

이 말씀은 무슨 말씀과 일맥상통하냐 하면,
마태복음 10장 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しかし、人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ような者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んな者は知らないと言います。
여러분, 법원의 법정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장 석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검사석에는 모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변호인석에는 누가 계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피고인석에 있어요.

요한복음 5장 45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わたしが、父の前にあなたがたを訴えようとしている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訴える者は、あなたがたが望みをおいているモーセです。

모세는 검사석에서 나를 향해 외칩니다. 저 사람은 이런 율법을 어겼고, 저런 잘못을 저질렀다면서 나의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은 분명 죄인이지만 내가 십자가에서 저 사람이 받을 벌을 모두 받았습니다. 저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저 사람이 받을 벌은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시고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부인을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의 길, 우리의 죄로 인하여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밖에서 식사할 때 너무 큰 소리로 해도 좀 그렇겠습니다만,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죠.

한국에서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날 때 보면 그런 분들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무슨 간판을 앞뒤에 걸거나 마이크를 들고 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길 가다가 그런 분들이 소리치는 것을 들으면요, 사실 제가 좀 창피해지고 그랬습니다. 아니, 저런다고 누가 예수를 믿어? 믿기는 무슨, 믿으려고 했다가도 저런 걸 보면 안 믿겠다……그런 생각도 하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시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쓴 시인데, 제목이 <너에게 묻는다>예요.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생각할 때, 내가 저 분들처럼 뜨겁게 전도를 한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믿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열정을 갖고 전도를 해본 적이 있을까. 그러지도 못하면서 내가 저 분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거기 같이 있던 죄수들이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오묘한 것은 죄수들이 그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듣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적혀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불만을 느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생각해보세요. 감옥이 넓어 봐야 얼마나 넓었겠습니까. 그리고 방음이 될 리가 있겠나요. 그런 상황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찬양하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하지는 않았겠지요. 조용조용히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서로 은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귀에 거슬렸겠지요. 아무리 조용히 한다 하더라도 밤중에 남들 자는데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그러니 누가 좋아했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거 잠 좀 자라, 라고 하거나 못 마땅하다고 해서 해코지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마침 거기 착한 사람들만 있었어요? ㅎㅎ 생각해보세요. 거기가 어디에요? 감옥이었습니다. 얼마나 거친 사람들이 많은 곳이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을 보니까 모습이 영 딱한 모습이거든요. 그런데도 원망이나 신세 한판이나 팔자 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교회에 다니고, 한국 복음방송을 듣고 그러면서 느낀 것이, 아, 정말 한국에 있을 때 방탕하게 살지 말고. 조금 더 예수님을 잘 믿고 전도도 많이 하고 찬양집회에도 많이 가고 그럴걸……그러지 못했던 것이 참 후회스러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미국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럼 전도도 많이 하고 찬양집회에도 많이 가고 그랬을까요? 다시 일본으로 오기 전까지 서울에 9년 정도 있는 동안에 전도는 무슨……찬양집회는 2~3번 갔나?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서울에 얼마나 놀 것도 많고, 같이 놀 친구들도 많고, 그랬겠습니까.

그랬더니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래선 안되겠다>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죠. 이제 놀 것도 없고 친구들도 없는 여기 군마현으로 저를 데려다 놓으셨어요. 그 군마 중에서도 시골인 시부카와, 그 시부카와 중에서도 좀 번화한 곳도 아닌 이렇게 높은 산 중턱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시내 쪽으로 옮기고 싶어도 이 교회 건물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옮길래야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 교회 건물이 크고 훌륭하고 멋있어요? 멋있기는요, 저한테는 얼마나 마음의 부담인지 모릅니다.


목사가 별거인가요? 답답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죠. 그래도 목회를 하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답답하면 기도하고, 찬양하면 됩니다. 그리고 설교준비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전도하러 나가면 됩니다. 아무리 답답하다고 해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만큼이야 하겠어요?

마가복음 9장 43절~45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もし、あなたの手があなたのつまずきとなるなら、それを切り捨てなさい。片手でいのちに入るほうが、両手 そろっていてゲヘナの消えぬ火の中に落ち込むよりは、あなたにとってよいことです。もし、あなたの足があなたのつまずきとなるなら、それを切り捨てなさい。 片足でいのちに入るほうが、両足そろっていてゲヘナに投げ入れられるよりは、あなたにとってよいことです。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답답한 마음이긴 합니다만, 그 덕분에 주님의 일을 하면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전도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답답하십니까. 열받으십니까. 속상하십니까. 내 팔자가, 내 운명이 원망스러우십니까.

기도하고 찬양합시다.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られた方が、お聞きにならないだろうか。目を造られた方が、ご覧にならないだろうか。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후회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열심히 믿지 못했다고 생각되신다면 지금 후회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후회할 게 있다면 후회하시고, 그리고, 회개하실 일이 있다면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천국 문 앞에서 이것도 할걸, 저것도 할걸 그러지 말고 지금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후회와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남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드리고 내 평생 주님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삶을 예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을 다 마치는 그 날에, 어린양 예수님으로부터 눈부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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