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72회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

홍성필 2021. 6. 27.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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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
2017년 4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34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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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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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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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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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イエス様が受けた苦しみの意味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가 2017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인 주후 30년경 이스라엘 어느 지역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으시더니, 이제부터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텐데, 거기서 과거에 선지자를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나한테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이방인들한테 넘겨져서, 그들이 나에게 침을 뱉고 모욕할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채찍질을 하고 나를 죽일 것이지만, 삼 일만에 나는 살아날 것이다…. 이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같은 누가복음 9장 22절에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そして言われた。「人の子は、必ず多くの苦しみを受け、長老、祭司長、律法学者たちに捨てられ、殺され、そして三日目によみがえらねばならないのです。」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이제 머지않아 일어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신 것이 언제라고요? 예,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일입니다. 참 오래 전 사건이지요.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인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증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이 무엇 때문이셨습니까.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요? 예, 주님께서는 많은 병든 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또 무엇이 있었죠? 예,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주님께서는 3년 정도에 걸쳐 공생애를 하시는 동안에 살아있는 천국 복음을 전파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들은 성경에서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선지자들은 질병을 고치기도 했고,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열왕기하 5장에서는 엘리사가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치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셨더라도 그 정도는 선지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오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의인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들이 친히 오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끌려가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서 거기서 못 박히시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 참으로 처참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를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채찍에 맞고 능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거룩하게 아픔도 느끼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욱 처참한 모습으로 피범벅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시고 끌려 올라가서 거기서 못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이 죽어야 해요? 그래야지 우리의 죄가 해결돼요? 그렇다면 그냥 쉽게 돌아가시면 되지, 왜 그렇게 피를 흘리고 고통과 고난을 겪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얼마 전에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그우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 이름은 たかまつなな라고 하는데, 이 분의 증조부는 동경대 명예교수이자 도쿄가스 사장을 지냈다고 하고, 자신은 전통 있는 사립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케이오대 종합정책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개그우먼 활동을 하면서 케이오대학 대학원과 동경대 대학원을 동시에 이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인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집안도 서민들의 생활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은 주위 친구 집에 비하면 절대로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방은 10개 정도밖에 없었다고 해요. 가족이 각각 쓰는 방과 피아노를 치는 방, 책을 읽는 방,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곳, 휴게실 같은 공간, 그리고 별로 많이 쓰지 않았지만 차를 마시는 방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편의점은 치안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가본 적이 없고, 택시는 유괴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로 모셔가고 모셔오고 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우리와 같은 서민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살 때, 거스름 돈이 나오는 그 구멍에 동전이 남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 우리의 이 서민적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들겠지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모르지만, 우리 다 크고 어른이 된 다음에, 남들 보는 앞에서 여러 사람들한테 둘러 쌓여 뺨을 맞고 모욕적인 일을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본 적이 있어요? 누가 나를 살갗이 떨어져 나가도록 갈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때린 적이 있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피범벅이 되어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서, 거기서 못 박힌 적이 있어요? 지금은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비참한 형벌을 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끔찍하고도 처참한 징벌을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그린 앞서 말씀 드렸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비롯해서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고 참 예수님도 불쌍하시지. 아이구 저런 쯧쯧쯧……예수님을 저렇게 마구 때리고 죽이다니, 로마 군인들은 정말 참 나쁜놈들이야……아니아니……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나쁜 놈이지……아니, 그것도 아니야. 바로 저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나쁜 놈들이야……어떻게 죄 없는 예수님을 저렇게 죽일 수가 있을까……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는 크나큰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로마 군인들 때문입니까? 가룟 유다 때문입니까? 아니면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때문입니까?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나요?

베드로전서 2장 22절~25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V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キリストは罪を犯したことがなく、その口に何の偽りも見いだされませんでした。ののしられても、ののしり返さず、苦しめられても、おどすことをせず、正しくさばかれる方にお任せになりました。そして自分か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です。キリストの
V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のです。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초를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누가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바로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가 겪은 아픔보다도 그 수 백배의 아픔, 그 수 천 배의 아픔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원통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겪은 원통함보다도 그 수 백배의 원통함, 그 수 천 배의 원통함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원통함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겪은 억울함보다도 그 수 백배의 억울함, 그 수 천 배의 억울함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억울함을 아십니다.

성경을 살펴봅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のです。

우리의 무거운 죄악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원통함, 우리의 억울함을 모두 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만 믿으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인가요?
더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요? 이건 제 개인적인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모두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셨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가 없는 존재 아니냐? 그런데 무슨 또 회개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니면 허구입니까?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실제로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허구입니다. 아니, 허구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왜곡하는 심각한 영적인 범죄 다름 아닌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나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번 병을 고쳐주셨으니 이제 병에 걸리지 않나요?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저한테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아니, 예수님이 질병을 고쳐주셨는데, 다시 병에 걸린다는 것은,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치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소리냐?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죽을 병에 걸려서 여명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병이 낫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치료를 해주셨어요.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 분의 질병이 낫고 퇴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사람은 영원히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거나 하면 또다시 질병에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해요?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ほんとう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のならばです。まさしく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うなら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滅びて行く古い人を脱ぎ捨てるべき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心の霊において新しくされ、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り出さ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ことでした。

만약에 그 질병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에 의한 것이라면 그와 같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질병에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으니,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도 죄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해석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 교회…아니, 그렇다고 꼭 한국에 있는 교회만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입 달린 분들은 모두 하시는 말씀이 한국교회, 또는 한인 교회가 위기라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사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도 지금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고 우리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끊어야 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마다 끊어야 할 오래된 습관인 구습, 나쁜 습관인 악습이 있습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돈에 대한 유혹이요, 둘째로는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것이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유혹들이 교회 내에서까지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인교회들의 실정을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큰 건물을 짓고,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리고 목회자 자녀들은 해외유학을 시킵니다. 비싼 학비에 생활비에 고급차에……오해하지 마십시오. 한국교회 모두가 100%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이 드물지 않게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다 무엇입니까? 다 어디에서 나온 돈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모두 성도들의 헌금입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하는 일이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다 좋은 일일거야…… 이렇게 넘어갔을지는 모르지만, 요즘 성도들이 보통 현명하십니까? 대부분이 다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볼 때 자신들이 낸 헌금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헌금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라고 한다지만서도, 내가 낸 헌금이 그런 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흔쾌히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을 하고 싶어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성도가 줄어들고,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권력 또는 권위에 대한 유혹입니다. 한국이나 아니면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 같은 경우에는 <목사>라고 하면 무슨 예수님 모시듯이 합니다. 그렇게 주위에서 그저 무조건 목사님 목사님 하고 섬기다 보니 어떻게 되냐 하면 목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잠시 다닌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서 만나뵌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좀 의아스럽습니다.

그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성도들이랑 같이 목욕탕에 가거나, 같은 화장실을 쓰면 안 된데요. 왜냐 하면 그것만으로 성도들이 자기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니, 이건 누구한테 건네 들은 게 아니라 실제로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말 그래요?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자기가 어렸을 때에는 무슨 연예인 아이돌 가수들은 화장실에도 안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다던데, 목사들도 그런 거예요? 화장실도 안 가고 그런 거룩한 존재예요? 목사가 거룩합니까? 거룩하긴 뭐가 거룩해요? 다 똑 같은 사람입니다. 대형교회 당회장이나 이제 막 주님을 영접한 새신자나 모두 예수님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말씀을 드리면요, 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이라고 말하면, 교회에서는 주로 술이나 담배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면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해요. 이런 말씀 혹시 많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누가 하느냐 하면, 교회 목사님이나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합니다. 하물며 아직도 술이나 담배를 못 끊었다면 구원 받지 못한 거라는 분도 계실 정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교회나 한인교회에 보면 맨날 일어나는 일이 교회 내에서의 갈등, 그리고 교회가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그럽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보면 성도들끼리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도 모두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 분들이겠지요. 다 목사님들 장로님들이니까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그렇게 서로 거룩한 척하지 말고, 목사님 장로님 할 것 없이 서로 거하게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하면 오히려 금방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목사가 의인입니까? 장로님 권사님이 의인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모두가 의인이나 성인군자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의인척을 하니까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달플 때는 기도하라고 하지요. 하지만, 저도 정말로 힘들고 고달플 때는요 기도도 안 나오더라구요. 아, 정말 다 때려부숴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집어치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때려부숴버리거나 집어치워버리거나 하면 되겠습니까?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면 안되죠. 자기가 속상하면 자기가 해결해야지 왜 교회나 회사에서 깽판을 부리고 난리를 칩니까. 차라리 그럴 때는 괜히 의인척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차라리 술이나 한 잔 하고 푸세요.

도저히 안 될 때에는 저기 가서 예전에 끊었던 담배라도 한 대 피우세요. 괜찮아요. 그리고 어떻게 해요? 그리고 잠시나마 예수님을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속이 뒤집어지는데 예수님은 그 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그리고 뭐예요? 그래. 예수님도 그 때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속이 뒤집어지셨을 테니,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어 하시는 것도 아시겠지…….
아무리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그래, 니가 이뻐서 참는 게 아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참는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복음, 참된 은혜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이고 이제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능욕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로 그 험난한 길을 여기 쓰러지고 저기 쓰러지시면서 가셔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주간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예,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 죄 많고 못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그 대가로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이 감사를 어떻게 우리가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한 주를 주님이 받으신 고난과,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보혈을 묵상하시면서, 그리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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