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62회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

홍성필 2021. 6. 2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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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
2017년 1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4절~8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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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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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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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足を洗われるイエス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기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동안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기도 하셨고,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파도를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으며, 물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천국 복음도 전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가룟유다가 배신을 하여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그 사실을 다른 제자들은 몰랐으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시간은 1분 1초 흐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사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차례대로 씻으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냥 씻으신 것만이 아니라, 씻으시고는 그 묻은 물기를 깨끗하게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본 우직한 사도 베드로가 놀랍니다. 아니, 주님, 지금 뭘하고 계신 거예요? 왜 우리 발을 닦으세요? 그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わたしがしていることは、今はあなたにはわからないが、あとでわかるようになります。」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우직한 베드로,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습니다만, 이 베드로는 목소리를 높입니다.아~ 주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실 수 없습니다, 하고 강하게 거절합니다.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8절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もしわたしが洗わなければ、あなたはわたしと何の関係もありません。」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인지, 오늘은 이 말씀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그 상황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이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신은 신발, 더구나 서민들이 신은 신발은, 요즘으로 말한다면 슬리퍼를 좀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아스팔트 길이 어디 있나요. 당시 유럽지역을 지배했던 로마는 도로망 정비에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돌들을 이용해서 도로를 정비하기도 했습니다만, 모든 길이 그랬던 것은 아니죠. 대부분의 도로는 그저 쉽게 말하자면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그런 길을 이 신발을 신고 나가서 몇 발자국 걷기만 해도 금새 발은 먼지 투성이가 되죠. 그러니까 이 신발은 발바닥은 보호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발가락부터 해서 발등까지 다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발이 얼마나 지저분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발을 씻어준 것입니다.

요즘도 여러 교회에서 제자훈련 과정에서 이른바 세족식을 하는 곳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만이 아니라 미션스쿨이나 여러 단체에서도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말하자면 교역자나 직분자가 평신도를 섬긴다는 뜻으로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죠.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당시 잠시 다녔던 교회 청년부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세족식이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만, 당시 저는 평신도였기 때문에 제 발을 그 교회 청년부 리더들이 씻어주었습니다만, 그 때 미리 안내 프린트를 나누어주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참 재미있었습니다만, 일단 세족식을 하는 분들은 미리 발톱을 깎고, 반드시 발을 깨끗이 씻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죠. 뭐,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무슨 목욕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이벤트인데 지저분한 발을 만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세족식이 시작되고, 그 사람이 제 발을 씻어주었을 때, 맨 처음에는 분위기상 좀 감동도 받았습니다만, 조금 지나니까 무슨 감흥도 없고 그저 한 번 그런 걸 해봤다, 뭐 그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 심보가 고약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다른 단체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 발을 씻겨주는 분들이, 겸손한 마음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곳도 물론 많겠지만, 어쩌면, 그냥 보여주기식, 우리는 이런 것도 한다, 뭐 이런 과시용 이벤트처럼 여겨지고 있는 곳도 있겠다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에는 어땠습니까.
“너희들 잘 들어. 내가 지금부터 너희들 발을 씻어줄 테니까, 어여 가서 발 좀 씻고 와. 알았지?”
뭐, 이러셨어요? 아니에요. 제자들한테 아무 말씀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서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발이었을까요. 어차피 우리 몸을 씻어주시기를 원하셨다면 손을 씻어주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왜 발을 씻어주셨는지 먼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발은 우리 몸 중에서 그 당시 가장 불결한 부분이었습니다. 몸의 다른 부분은 물로 씻고 목욕을 하면 어느 정도는 그 청결함이 유지가 됩니다. 하지만 발은 어떻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방금 목욕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 발자국 바깥에 나가면 금새 지저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지저분한 부분, 가장 불결한 부분을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발이 지저분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발이 이 세상과 가장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얼굴이나 손처럼 바깥으로 노출된 부분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체 중에서 이 세상, 세상적인 것과 가장 오래 밀착된 부분입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으로 붙어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세상적인 문제, 여기에는 경제적인 문제, 신체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있겠습니다만, 이 모두가 다 세상적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혹시 여기에 지난 한 주 동안 영적인 문제로 인해서 깊게 고민해보신 분 계신가요?
아……이대로는 나는 구원받지 못할 지도 몰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을지도 몰라……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해보신 분 계신가요? 물론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고민에 대한 비중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이처럼 이 세상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 바로 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적인 때가 가장 많이 묻은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발을 씻어주실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세를 떠올려보세요. 어떻습니까. 좋은 의자에 앉아서 등받이에 등을 기댄 상태에서 상대방의 발을 씻어줄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 사람의 발을 씻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앞에 낮은 자세로 몸을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치 무릎을 꿇는 정도로 몸을 낮추어야지만 상대방의 발을 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발을 씻어주는 것은 당시 하인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치욕적인 자세입니까.
만약에 내가 발을 씻겨주는 사람이 나보다 훌륭하고 나는 그보다 한참 못한 사람이다……이런 상황이라면 뭐 그나마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예수님이 제자보다 못해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섬기는 사람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교역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 나아가 이걸 따라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인들까지도 국민을 섬기고 나라를 섬기갰다고 합니다만, 어디 그렇습니까. 입으로는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몸을 숙이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권세에 취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교회 위에 군림하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는 이 이유를 모르고 왜 제 발을 씻으시냐고 예수님께 물었더니, 지금은 너희가 몰라도 나중에는 내가 왜 이랬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만, 그래도 베드로가, 아~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러실 수 없습니다. 하고 완고하게 거절을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했더라면 예수님한테 무슨 칭찬이라도 들을 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만, 예수님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상관이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만, 이 장면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23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v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その時から、イエス・キリストは、ご自分がエルサレムに行って、長老、祭司長、律法学者たちから多くの苦しみを受け、殺され、そして三日目 によみが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弟子たちに示し始められた。するとペテロは、イエスを引き寄せて、いさめ始めた。「主よ。神の御恵 みがありますように。そんなことが、あなたに起こるはずはありません。」しかし、
vイエスは振り向いて、ペテロに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はわたしの邪魔をするものだ。あなたは神のことを思わないで、人のことを思っている。」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는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아~절대로 그러실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칭찬하십니까? 아니요.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까지 심한 말로 꾸짖으십니다.

이 베드로는 예수님이 싫어서 그랬어요? 아니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존경하는 마음에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뜻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번이나 혼이 난 것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째로는 우리 중에서 가장 불결한 부분을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둘째로는 세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셋째로는 섬김과 겸손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단순히 제자들의 발만 씻어주고 마셨나요? 이제 내가 할 건 다 했다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보여주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가장 불결하고 지저분한 우리의 죄악을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25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そして自分か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です。キリスト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のです。

우리의 죄악은 그저 양이나 염소나 데려다가 제단에서 불태우면 해결되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였습니까. 그렇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셔야지만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더 쉬운 방법을 택해셨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오직 그 방법만이, 십자가만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세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キリスト・イエスを、その血による、また信仰による、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公にお示しになりました。それは、ご自身の義を現わすためです。というのは、今までに犯されて 来た罪を神の忍耐をもって見のがして来られたからです。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왜 생겨납니까. 경제적인 문제, 신체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가 왜 일어납니까.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혈액순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 몸안에 있는 장기가 건강하다 하더라도 혈관 중 어디 한 군데가 막히거나, 아니면 좁아지거나 하면 곧바로 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전까지 별로 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저런 문제들이 발생해요. 경제적인 문제, 건강상의 문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문제가 하나 둘 생겨납니다.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딘가가 막혀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사람의 힘으로 됩니까? 아니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삼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나와의 막혔던 길이 뚫려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복종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위에 군림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죄악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고,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来 たの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かえって仕えるためであり、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あがな)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であるのと同じです。」

이 섬긴다는 것이 어쩌면 작고 쉬운 문제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섬기는 것이야말로 앞서 살펴본 우리의 죄악의 해결, 세상적인 문제의 해결을 열기 위한 열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17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v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先生とも主とも呼んでいます。あなたがたがそう言うのはよい。わたしはそのような者だからです。それで、主であり師であるこの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また互いに足を洗い合うべきです。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した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するように、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模範を示したのです。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しもべはその主人にまさらず、
v遣わされた者は遣わした者にまさ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ことを知っているのなら、それを行なうときに、あなたがたは祝福されるのです。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는 분명 너희들의 선생이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들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섬겼으니까 너희들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서로 섬겨라.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세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입니다. 그 반대는 뭐겠습니까. 너희가 이것을 모르고, 또는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복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온갖 고난이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고난을 겪고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섬김의 부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섬김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지름길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이 살펴본 세 가지, 죄악의 해결과 세상 문제의 해결, 그리고 섬김의 자세,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다 바쳐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 했지만 베드로는 맨 처음에 거절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죠? 내가 만약 너를 씻지 않는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리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 하더라도,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더라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내가 인정하고 믿고, 그에 대해 내가 감사하고 찬양할 때에 내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것이지, 이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는 여전히 십자가와 무관한 사람, 나는 여전히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세상 문제 속에서 허덕이는, 교만하고 딱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이 시간에도 일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이 시간에도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교만함을 해결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낮아짐으로 섬김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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