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8회 여호와로 즐거워하는 삶

홍성필 2021. 6. 26.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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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여호와로 즐거워하는 삶
2016년 6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하박국 3장 17절~19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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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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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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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여호와로 즐거워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뒤돌아보면 가난할 때도 있었고 풍요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이 넉넉할 때가 있나 하면, 또 어떤 때는 매우 조급하거나 인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보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찬양 중에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찬양을 한때 제가 즐겨 흥얼거렸는데, 그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왜 하필이면 그런 찬양을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제가 충분히 알죠. 찬양에 보면 “오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또는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뭐 이런 곡도 많은데, 하필이면 “내 재산이 없고 내가 빈털털이라도 여호와로 즐거워한다” 하는 찬양을 부르니까 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수 송대관씨가 “쨍하고 해뜰 날”이라는 노래를 부르니까 오랫동안의 무명생활을 끝내고 스타가 됐다. 하지만 반면 항상 궁상맞은 노래만 부르면 그 인생도 그렇게 되더라…….
그러니까 뭐예요? 찬양도 이왕 부르려면 좋은 말이나 듣기 좋은 말로 된 찬양을 불러야 한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자, 그렇다면 이런 찬양을 드리면 내가 가난해진다는 건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어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럼 찬양에는 말하자면 재수 좋은 찬양과 재수없는 찬양이 있다는 건가요?
우리에게 있어서 가난은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가난해야 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남들을 속이거나 괴롭혀가면서 돈을 빼앗고 부를 축적하면 안 되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재산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주머니사정이 어려워지고 내 살림살이가 힘들어졌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말씀인가요?
시편 102편 17절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시편 107편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잠언 15장 3절에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시편 9편 18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를 잊지 않고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성경은 언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나요? 좋은 일이 있을 때만요? 아니면 우리 형편이 넉넉할 때만이요? 아니요, “항상 기뻐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마 성경이 우리더러 좀 머리가 이상한, 정신병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 받았나요? 이제 하나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나요?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우리가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밤새도록 통곡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28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시편 9편 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주를 아는 자, 주를 의지하는 자, 주를 찾는 자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가난과 역경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사무엘상 2장 3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눈은 어디서든지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시고,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감찰하신다고 하고, 달아보신다고 하면 마음이 어떠세요? 불안하세요? 걱정 되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소 같은 곳에서 보면 그 안에서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동안 감시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누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나 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걸리기라도 하면 아주 혹독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이유가 우리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서인가요? 물론 벌을 내리시기도 하지요.
잠언 3장 11절~12절에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장 6절~8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징계입니다.
욥기 5장 17절~18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이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을 주시려고 합니까.
누가복음 12장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가난과 궁핍과 고통과 고난이 닥쳐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면 욥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고백합니다.
욥기 23장 8절~10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도대체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식들은 모두 죽고 그 많던 재산들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고 자기 자신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단순히 남들보다 인내심이 강해서요? 고집이 세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이렇게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더욱 강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어디 그 뿐입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그냥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 알자고 하시나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고통과 고난이 있더라도 피할 길을 내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을 알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한테 조금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하고 낙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실망하십니까. 왜 절망하십니까. 왜 낙담하십니까. 왜 슬퍼하십니까. 왜 분노하십니까. 왜 포기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고철이 아니라 순금으로 만들기 원하신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이 닥쳐올지라도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7절~8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그리고 넓은 곳에 세우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외양간에 갇혀 있는 송아지가 아니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껑충껑충 뛰어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시편 103편 3절~5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우리의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 아닙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과정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할 때, 우리의 힘이 되시고 주님께서는 나를 높이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놀게 하시고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9회 묵묵히 바라보시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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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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