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5회 내 눈 속의 들보

홍성필 2021. 6. 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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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내 눈 속의 들보
2016년 2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6장 42절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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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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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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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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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내 눈 속의 들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운전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제 맞은편에 있던 차가 갑자기 무리하게 커브를 틀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파란신호 때는 반대쪽으로 돌 수 없게 되어있지만 일본은 돌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맞은편에서 직진하는 자동차가 오지 않을 때 돌 수 있는 것이지, 올 때는 돌 수가 없지요.
저도 그쪽 방향으로 커브를 돌려고 했었는데, 도로교통법상으로 보면 우선순위는 저한테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차가 돌 때 돌더라도 제가 먼저 커브를 하고 자기가 돌아야 할텐데, 우선순위가 낮은 상대방 차가 먼저 돌아버리는 바람에 자칫 서로 부딪힐 뻔했습니다.
아무리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상대방한테 잘못이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운전에 있어서의 첫 원칙은 사고회피, 방어운전입니다. 하지만 그 때 순간적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일단 충돌을 피하고 난 다음에 경적을 울렸는데, 제 성격에 그것만으로 화가 풀리지는 않죠. 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차 앞을 막아서고 내려가지고는 그냥 확……. 아니면 적어도 창문을 열고 그 운전사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걸 그냥 확……. 해야 직성이 풀릴 상황이었지만 꾸욱 그래도 꾸욱 참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참으면 그래도 마음이 좀 풀릴까요? 마음씨가 착한 여러분이라면 “그래, 그냥 잊어버리자”하고 넘겨버릴 수가 있으셨겠지만, 그리 온순하지 못한 제 성격으로는 웬만해서 마음의 불편함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기도를 했죠.
“주님, 제가 지금 열불이 터지고 화가 나서 못 견디겠는데,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미 그 차는 다른 데로 가버렸기에 지금 쫓아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것 참 난감하게 되었네요. 주님도 방금 그때 그 상황을 보셨죠? 아니, 어떻게 거기서 갑자기 그렇게 커브를 돌 수가 있어요? 이거 정말 완전히 돌아버리는 상황 아니에요? 운전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 혼자 사고나면 그걸로 끝나겠지만,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면 그 사람은 무슨 죄에요? 폐를 끼쳐도 유분수지 어쩜 그렇게 남한테 민폐를 끼칠 수가 있어요? 아~ 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네요. 열불이 터져서 미쳐버리겠습니다.”
점잖으신 여러분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을 하십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기도가 꼭 교회 성전에 가서 무릎꿇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기도는 아니지요. 만약에 그것만이 기도라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을 지키려면, 그럼 다른 일은 하지 말고 하루 온종일 성전에 가서 무릎꿇고 기도만 하라는 것인데, 우리한테 그것은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마태복음 28장 20절 중반부 이후에 보면,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그렇다면 기도는 세상 끝날까지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걸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기도를 드렸습니다만, 그 때 마음에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너도 지금까지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면서 살아오지 않았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한테 끼친 민폐를 생각해봐라.”
이런 마음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제 마음이 부끄러워지고, 아까 그렇게 쌓였던 분노가 사르륵 녹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끼친 민폐가, 그날 제가 겪은 한낱 그런 미약한 민폐 정도겠습니까. 지금까지 남들을 힘들게 하고 울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런 민폐를 끼치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도 다행이 큰 탈 없이 무사히 살아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38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최초로 타락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말을 믿고 열매를 따 먹습니다. 자,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졌습니까. 밝아졌죠. 무엇이 보였습니까.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신들을 더 이상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까? 선과 악을 알게 되긴커녕 사람들을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6절에서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모두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로우시기에 그 분의 판단은 참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의 판단을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것은 참되고 완전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이 그것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완전한 판단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판단하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판단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로마서 2장 1절에서 2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 42절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이 말씀을 만약에
“너 안에 있는 흠을 없애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든지 해라” 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흠을 없앨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참되고 공의롭게 판단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야고보서 4장 11절에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판단이라는 것은 뭐예요? 이 사람은 이렇게 안 좋다,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쁘다……. 이런 비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누구를,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인간이야…… 라고 한다면, 내 죄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피를 조금 흘려도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저 사람의 죄를 위해서는 피를 많이 흘려야 용서 받을 수 있어……. 마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는 채찍을 한 번만 맞으셔도 됐었는데, 저 사람의 죄 때문에 채찍을 많이 맞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이나 나의 죄는 모두가 다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수도 없이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돌아가셔야만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한테 있는 죄나 나한테 있는 죄나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래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 내가 잘했고 네가 잘못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서 서로가 미워하고 서로가 다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내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죄나 너의 죄나 결국은 다 똑같다.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께서 사해주셨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웬만하면 이웃도 사랑하지 그래? 라고 하는 권고가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라는 말씀은 뒤집어보면 어떻게 되나요? 서로가 사랑해야지 예수님의 제자이지,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것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 너도 못 났지만, 나도 못 났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 나봤자 뭐가 얼마나 잘 났겠냐. 우리가 잘났다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요,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으셨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게 되죠? 그렇죠.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5장 5절~6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우리 힘으로 높아지려는 것은 마치 우리 힘으로 산을 오르려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산이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에베레스트 산입니다만, 높이가 8848미터입니다. 여기에 오르려면 먼저 오랜 세월에 걸쳐 훈련을 해야 하고 등반준비도 6개월 정도를 해야 하고, 실제로 산에 오르는 시간도 최소한 30일을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도 무사히 정상을 오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죠.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어떻습니까. 일반 여객기의 경우 국내선은 비행고도가 약 6600미터에서 8400미터, 국제선은 7800미터에서 1300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까지 오르기 위해서 사람이 무슨 대단한 훈련이나 고생을 하나요? 아니면 시간이 몇 개월이나 걸리나요?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높아지려고 한다면 이는 그만큼 힘이 들고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봤자 10킬로도 못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룩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7장 14절에서 15절에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줄 알고 지키려고 애를 써요. 그리고 선한 일을,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을 해요.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죄 가운데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해결해줍니까. 이를 해결해줄 분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이웃보다 잘난 것도 없고 모두 죄인이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함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높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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