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33회 달려가야 할 이유

홍성필 2021. 7. 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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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3회 달려가야 할 이유
2020년 5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ピリピ人への手紙 3章13節∼14節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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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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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달려가야 하는 이유” 走ら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기도문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문 중에는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기도문이 아니더라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즉 선민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자부심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인가 하는 것이지요.

성경 특히 구약에서 보여주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리십니다. 이로 인해서 평화와 평안이 찾아 오지요. 하지만 이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머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 타락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 보내서 경고를 합니다. 권면을 합니다. 너희를 지금이라도 회개를 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預言者たちを殺し、自分に遣わされた人たちを石で打つ者よ。わたしは何度、めんどりがひなを翼 の下に集めるように、おまえの子らを集めようとしたことか。それなのに、おまえたちはそれを望まなかった。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섬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삼판을 하십니다. 천재지변이나 또는 주변에 있는 민족들을 격동해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게 하십니다.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이제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사사, 또는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아,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우상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고 또다시 그 땅에 평화가 찾아오지요. 그런데 그러면 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버립니다.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들의 무한반복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떠한 일들을 되풀이 해왔는지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본다면 글쎄요. 그렇게 자랑스럽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한 마디로 정리를 한다면 배반과 고통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배반은 당연히 유대인들이 보여왔던 안 좋은 역사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고통의 역사는 무엇인가 하면, 이는 우리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하시고 싶으십니까. 아이고,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고통의 시작은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는 이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을 봅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만드시고는, 사람한테는 단지 무슨 지키기만 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 천하 만물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온 천하는 다름 아닌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입니까.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의 자손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축복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단 한 가지 명령,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그 단 한 가지 명령을 어기고 맙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그 아름다웠던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 하나님 마음은 어떠셨겠습니까.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디 뜨거운 맛 좀 봐라……라고 고소해하면서 벌을 내리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아파하셨습니다.

이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두 구절입니다. 먼저 창세기 3장 15절을 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두 번째 구절은 조금 아래 창세기 3장 21절입니다.


창세기 3장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神である主は、アダムとその妻のために、皮の衣を作って彼らに着せられた。

우리는 이미 이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마귀는 여자의 후손을 헤치려 하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마귀 사탄을 완전하게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를 보고, 아,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처럼 가죽옷을 짠 하고 만드셨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분명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순서에 따라서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그 이전에는 모두가 이 세상에 없었던 것들, 완전히 새로운 것들입니다.

빛을 만드시기 전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까지는 해와 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을 때 처음으로 이 세상에 빛이 생겨나고 해와 달도 생겨났으며, 모든 생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옷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이미 세상에 있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죽 옷이 소가죽인지 호랑이 가죽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분명 <생명의 죽음>이라고 하는 희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짐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이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죽음>이라고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희생은 어디로 이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어디 유대인 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방인입니까. 성경에서 주인공은 저기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이고 우리는 그럼 성경의 엑스트라, 행인 1, 2와도 갈은 존재인가요?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육신의 유전자적인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면적인 유대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은 우리 모두가 이면적인 유대인, 진정한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우리도 역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고통을 받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만약에 이와 같은 고통을 안 받으시려면 어떻게 하시면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싹 쓸어버리면 깨끗하지요.

이거 처음 만들다 보니 잘 안 되네. 아담과 하와? 됐어. 너희들은 없던 걸로 치고, 자, 이번엔 좀 신경을 더 써서 새로 만들어보자……어떠세요? 차라리 그게 더 훨씬 현명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질문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한 번 저만 볼 수 있도록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는 데에 찬성!
2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는 데에 반대!

1번을 선택하신 분들은 참으로 하나님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2번을 선택하신 분들은 참으로 하나님 생각을 안 하시는 분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찌감치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셨더라면 굳이 사탄이 메시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일도 없었겠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실 필요도, 없었고, 가시관을 쓰씨고 피범벅이 되신 채로 십자가를 짊어지실 필요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좀 하나님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1번을 선택하셨어야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토록 빨리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실 정도의 하나님이셨다면, 어떠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벌써 옛날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많고 불순종한 우리를 아마도 수 십 번은 포기하고도 남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2장 3절~4절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傷んだ葦を折ることもなく、くすぶる灯芯を消すこともなく、真実をもってさばきを執り行う。
衰えず、くじけることなく、ついには地にさばきを確立する。島々もそのおしえを待ち望む。」

아무리 죄가 많고 부족한 우리라 하더라도 끝까지 참으시는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까지 하시면서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던 사도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 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로 미루어 본다면 부활하신 예수님 손과 옆구리에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났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남아 있었을까요. 아직 부활한지 얼마 안 되어서 상처가 덜 아물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마태복음 11장 4절~5절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行って、自分たちが見たり聞いたり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든 질병이 순식간에 나았으며 죽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 3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시든 오시지 않든,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이나 짊어지신 다음이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다만 큰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손에 있는 못 자국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위대하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손에 못 자국이 없으시다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시고 죽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손의 못 자국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신 분,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끝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두꺼운 성경 중에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만 하고 예배만 드렸더니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응답했습니다. 축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를 믿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났나요? 아니요. 실천에 옮겼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4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이는 모세도 그랬었고, 그 이전에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았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그저 감사하면서 찬양하고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면 된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가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그냥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생 동안 편안한 침대 위에 누운 것처럼 살다 가라고 그러신 것입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그냥 우리더라 편안하게 살다 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들은 완전히 쓸데없는 고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요즘을 보면 참 취업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합니다만, 대학이나 회사가 매년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을 뽑고 있습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자기 학교, 자기 회사에 들어와서 편안하게 쉬게 하기 위해서 모집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뽑기 위해서 시험도 보고 면접도 보는 것입니다.

좋은 학교나 좋은 회사는 편안하게 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곳은 어디든지 들어가기가 어렵지요. 여기에는 물론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정말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대학 재수를 하고 1년 뒤에 다시 입학시험을 보는데……아직도 기억이 나요. 국어 시험이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한자 읽기 문제도 나온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뭐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었는데, 그런데 제 기억에 시험 시작하기 20~30분 전이었나 그래요. 이렇게 보는데 제 친구녀석이 막 종이에 한자를 적으면서 외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시작 시간 다 됐는데 지금 공부한다고 뭐가 되겠나 싶었지요.

그래서 뭘 하나 하고 봤더니만, 지금도 제가 눈이 나쁩니다만 그 때도 제가 눈이 좀 안 좋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서서 책상에 보니까, 작은 글씨로 공책에 빼곡하게 글씨들이 적혀 있는데, 한 가운데에 하얗게 빈칸이 뻥 뚫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상하다. 저게 뭐지? 조금 유심히 보니까 다른 곳에는 볼펜으로 진하게 글씨가 적혀 있는데, 딱 글자가 두 글자 들어갈만한 넓이인데 거긴 글씨가 안 적혀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왜 부자연스럽게 여기만 비워놓았나 하고 조금 더 자세히 봤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은 다 진하게 볼펜으로 한자가 적혀있는데, 딱 그 두 글자만 연필로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뭐야? 왜 이것만 연필로 적어놓았어……라고 물으려고 그 한자를 봤더니, 저도 못 읽겠더라구요. 당시 제가 처음 보는 한자예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야, 이게 뭐라고 읽냐? 그랬더니 그 친구 했던 말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 친구가 뭐라 그랬냐 하면 “야, 이게 농담이라고 읽는대. 골 때리지 않냐?” 그러더라고요.

<농담>이라는 한자가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일본식과는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야, 이걸 <농담>이라고 읽어? 신기하네……라고 하고, 이제 시험 시간이 되어서 이제 문제지를 받아보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딱 그 한자가 나와 있는 거예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대학 입학시험이잖아요. 어쩌면 그 문제 하나 때문에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이 <농담>의 <농>자가 우롱하다, 희롱하다…할 때의 <롱>자인데, 아마도 이 <농담>이라는 한자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그 친구를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너 붙으면 자기 덕분인줄 알아라.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나중에, 아니 왜 거기에 그 한자 두 글자만 연필로 썼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대요. ㅎㅎ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 참고로 그 친구도 붙었어요. 공대였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이름이 용민이라고 기억하는데, 참 똑똑한 친구였어요. 글쎄요. 지금은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저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는 제 대학 후배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이 후배는 음대 친구인데, 역시 대학 입학 때 이제 음대니까 음악 시험 문제를 풀고 있는데, 딱 한 문제가 도저히 답이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그게 국악에서의 도레미파솔라시도 같은 음계 중에서 하나를 맞추는 문제였다고 해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답이 한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자기가 아는 답이래요. 그리고 그 한자는 그리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도 더 이상 기억이 안 나더랍니다.

자, 이제 시험이 끝날 때까지 3분이 남았어요. 그래서 이 친구도 믿음이 있는 친구였는데, 그 시험시간 때 기도를 했다고 해요. 주님. 제가 이 문제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는데, 이 답을 알려주시면 제가 평생을 간증을 할 테니 제발 답을 알려달라고 기도를 했더랍니다. 그런데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눈을 딱 떴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하는 동안에 시험 감독관 선생님이 답안지에 도장을 찍고 가는데, 그 감독관이 찍은 도장에 수풀 림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게 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 이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냐 하면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전도사로 아주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이 친구가 성악을 전공을 했는데, 예전에 제가 이 친구 노래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데,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구 노래를 듣고 실제로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정말 놀라운 능력을 가진 전도사님이에요.

참 이런 것은 정말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그와 같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혹시 이런 말씀을 듣고 부럽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일은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주님의 손길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대학입시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들을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옆 사람 답안지를 봤다거나 몰래 무슨 책을 봤다거나 하면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이라면 이는 부정행위가 안 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면 영적인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부정행위 중의 부정행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죄가 많고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근처에도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학교나 대학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자격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 좋네. 할렐루야~ 하고 그냥 감사만 하고 예배만 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학교에서 뽑아준 이유는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뽑아준 것이고, 회사나 자격시험에 합격시켜준 이유는 했다면 열심히 일을 하라고 합격시켜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 속에서 구원해주신 것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이 아니요, 주님의 일을 감당하라고 구원해주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그리고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바울이 이루어놓은 일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실 상을 내가 아직 받았다고 안심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이걸 했다 저걸 했다 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일들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주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바라면서 달려간다고 합니다.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나 달려간다고 상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전세계에 보면 자동차 회사는 대부분 대기업이지요. 그만큼 들어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 회사에는 물론 여러 부서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자동차를 많이 팔면 좋은 평가를 받아서 월급도 많이 받고 승진도 하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회사 자동차를 많이 판다고 아무나 그 회사에서 월급을 받거나 승진을 하나요?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렇죠. 그 회사에 입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달려간다고 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에 입사를 했습니다. 이제 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달려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달려가면 상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께 어떤 일을 맡겨주셨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무슨 돈 많이 내라는 거구나 하고 들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섬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어디 그것 뿐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건강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은 고된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우리들의 특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이유, 우리가 달려갈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일을 했다, 저런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날까지 우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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