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기쁨”
三つの喜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어떤 친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문득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야,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도 그렇고 이 친구도 그렇고 잠시 멍하니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예, 그렇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라는 말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는 두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합쳐놓으니까 이게 알 것도 같지만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 성경은 어떨까요. 여러분, 잠깐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먼저 이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진주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러분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이 말씀을 듣고, “음? 왜? 뭐가 이상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허허어,
홍 목사. 왜 그러시나.”라고 의문을 갖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못 들으셨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진주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사실 이건 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얼마 전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문득 이 말씀이 떠올랐어요. 그러면서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아니, 진주는
바다에 있어야 하지 않아요? 바다에 사는, 무슨 조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조개 안에서 발견되는 게 진주잖아요? 그런데 왜
성경에는 진주가 밭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을까. 오타인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이 잠깐 착각하셨나?
그래서 한 번 찾아봐야겠다 생각하고 집에 와서 찾아봤더니, 아이구 웬 걸이요.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진주요? 아니에요. 보화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그러면 진주는 안 나오나요? 아니요. 나옵니다. 바로 다음 구절이에요.
마태복음 13장 45절~46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天の御国はまた、良い真珠を探している商人のようなものです。高価な真珠を一つ見つけた商人は、行って、持っていた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れを買います。
참 얼마나 정확합니까. 그렇죠. 진주가 밭에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정말 창피하게도 제가 이걸 섞어가지고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식으로 헷갈려버린 것입니다. 참 제 부족함을 반성하는 한편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서 또 다른 의미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류가 적을까요? 아니요.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분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여러 가지 경우에 쓰인대요. 누구를 부를 때에도,
할렐루야! 김 집사님! 할렐루야!
지나가니까 길을 좀 열어달라고 할 때에도 할렐루야! 자, 지나갑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급히 주의를 줄 때에도 “할렐루야! 할렐루야! 뛰면 안 됩니다!”
뭐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는 말의 명령형과,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
“야”가 결합된 말. 즉 ,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지극히 거룩한 말씀입니다만, 이 말을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여러 경우에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은 그냥 막연하게 추상화처럼 적힌 책이 아닙니다. 자세한 의미를 몰라도 그냥 느낌만으로 알기만 하면 되는 그런 책이
아니에요. 오히려 대단히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반도체 정밀기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첨단기기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신경을
씁니다. 작은 먼지라도 들어가면 큰 일입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를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21절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ただし、聖書のどんな預言も勝手に解釈するものではないことを、まず心得ておきなさい。預言は、決して人間の意志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ものではなく、聖霊に動かされた人たちが神から受けて語ったものです。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아무데나 대충대충 갖다 붙인다고 모두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할 수도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이와는 별개로 네이버 카페도 운영하고 있는데, 며칠 전에 어떤 신흥종교집단에서 어떤
글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 글은 그 단체 교주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이런 글로 시작합니다.
“나는 계시록 22장 8절과 16절에 약속한,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계시록이 성취된 것을 증거하라고 보내신 사자입니다”
이 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냥 비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성경 구절이 있으니 살펴보아야지요. 계시록 22장
8절? 이건 오타인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8절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
しようとした。
여기엔 별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16절, 여기에는 <사자>라는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わたしイエスは御使いを遣わし、諸教会について、これらのことをあなたがたに証しした。わたしはダビデの根、また子孫、輝く明けの明星である。」
하지만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요한에게 환상을 보게 하여 교회에 이 요한계시록, 성경 말씀을 적게 하였다는
말씀이지, 먼 훗날에 사자를 보내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약 2,000년이 지난 재림 때인 오늘날 또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를 받아 주지 않고 핍박하면, 초림 때의 예루살렘의 목자들과 장로들
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 글을 쓴 사람은 자기를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하려는지, 아니면 재림 예수라고 하려는지를 혼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분은 예수님이지 예수님의 사자가 아니지요. 그리고 자신이 재림예수다?
요한계시록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
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이는 성경 다른 곳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0절
“22.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そのとき、人の子のしるしが天に現れます。そのとき、地のすべての部族は胸をたたいて悲しみ、人の子が天の雲のうちに、偉大な力
と栄光とともに来るのを見るのです。
누가복음 17장 23절~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人々は『見よ、あそこだ』とか、『見よ、ここだ』とか言いますが、行ってはいけません。追いかけてもいけません。人の子の日、人の子は、稲妻がひらめいて天の端から天の端まで光るのと、ちょうど同じようになりま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구원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용서의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13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この方はもとから世におられ、世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のに、世はこの方を知らなかった。この方はご自分のところに来られたのに、ご自分の民はこの方を受け入れなかった。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2천년 전, 그 때는 아무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권세
잡은 자들,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아니,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을 박혀버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그와 같은 소박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십니다.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들까지도 그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무슨, 뉴스 같은 데에서 들어서 안대요? 아니요.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그 소식은 순식간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저……제가 예수님이에요. 라고 말할 때까지 몰랐어요? 그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빛의 속도가 어느 정도요? 예, 초속 30만 킬로,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속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는
이 땅에 있는 누구나가 다 알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그 때는 이제 구원의 주님이 아닙니다. 자비로운 주님이 아닙니다.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빼놓아서는 안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3절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선지자나 예언자는 세례 요한으로 끝입니다. 과거에는 몇몇 제한적인 사람들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가림사건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직접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아까 그 글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 그 글을 쓴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썼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상에 보면 자기가 예수다, 선지자다, 사자다, 예언자다 하면서 이상한 교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은 원래 토요일이니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양 잡고 염소 잡고 태워서 제사를 드리나요? 그건 또 아니에요.
이건 무슨 구약도 아니고 신약도 아닙니다. 글쎄요. 마치 라면을 포크와 나이프로 먹으려는 것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온전히 신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이요,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오해가 이런 이단이나 신흥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群衆を弟子たちと一緒に呼び寄せて、彼ら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従って来たければ、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어흠, 잠시 한 3분 정도 좀 부흥회 모드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준비 되셨나요?
자,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가 작아요, 다시 한 번, 자, 더 큰 소리로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로 피범벅이 되어서 골고다로 향하는 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셨습니다. 너무나도 괴롭고 너무나도 힘들어서 몇 번이고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악을 해결하기 위해서 넘어지면서도 쓰러지면서도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그 고난의 길, 그 고통의 길을 우리도 함께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가셨던
길입니다. 그 길을 우리도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남들은 비웃더라도 남들은 미련하다면서 손가락질 하더라도 우리는 그 고난의 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더라도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 닥쳐 오더라도, 어떠한 고통이 우리를 막아
선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오르는 그 길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십니까. 괜찮았어요? 이런 내용과 비슷한 말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닌 분이시라면, 적어도 한 두 번 정도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지금 드린 말씀. 괜찮습니까? 이대로 그냥 설교를 마쳐도 괜찮겠어요?
만약에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려고 해요. 그러면 지금 제가 드린 말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의 길,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그 힘든 길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하실 건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으면서 피범벅이 된 채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로 올라가는 것
같은 거야……그렇게 전도하실 건가요? 그러면 아하!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정말 멋진 거구나! 하고 생각해줄까요?
잘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원래 예수 믿는 일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과 고난이 동반되지만, 이 사실을 숨기실 건가요? 그냥 좋은
것만 얘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교회에 나오게 만드실 건가요? 여러분, 만약에 그렇게 하신다면 이는 사기입니다. 그렇잖아요? 이는
거짓말하는 것, 속이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고난을 우리도 함께 겪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왜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로 십자가를 짊어지며 겪으셨던 고통,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던 그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런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신 당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도 똑 같은 고통과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지 간에 나도 똑
같은 고통을 당해야지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십자가를 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다름아닌 복종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모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복종하셔야 할 부분이 있었다면 우리도 복종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를 들어
지구보다도 큰 바위, 태양보다도 큰 바위를 옮겨놓으실 정도의 너무나도 힘든 복종이셨다면, 우리는 그저 작은 돌멩이 하나, 모래알 하나
정도를 옮기는 정도, 그야말로 흉내만 내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고난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복종 •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기쁨은 첫째로 믿음을 통한 기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해결해주셨다는 믿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믿음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통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무엇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화요? 드라마요? 아니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어디에 예수님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聖書の中に永遠のいのちがあると思って、聖書を調べています。その聖書は、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いるものです。
신약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66권 모두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곧
성경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면 이는 맞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 듯한 말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행함을 통한 기쁨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보면 <행함>이라고 하면 무슨 특별한 봉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만, 그것만이 행함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우리 일상 생활에서까지도 모든 행함을 가리켜야 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행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ですから、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う者はみな、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を襲っても、家は倒れませんでした。岩の上に土台が据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것으로 끝, 아무런 행함이 없다면 이는 금방 무너져 내리는 집이나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행함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 이는 씨와 밭과 가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씨를 사왔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이 씨를 심을 밭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 믿음을 심을 밭이
말씀인 것이지요.
자, 이제 씨도 샀고, 밭도 구했어요. 그러면 이제 끝이에요? 아니에요. 이것을 심어야 합니다. 씨를 밭에 심고 물을 주고 비료도
주고 해서 가꾸어야지요.
고린도전서 3장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私が植えて、アポロが水を注ぎました。しかし、成長させたのは神です。
믿음이라고 하는 씨를 말씀이라고 하는 밭을 구하여 행함으로 심고 가꾸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서 마침내 큰 수확을
얻도록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왜 씨를 가지고 있으면 기쁩니까. 예, 그 씨로 인해서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왜 밭을 구하면 기쁩니까. 예, 그 밭을 통해서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왜 물을 주고 가꾸면 기쁩니까. 그렇습니다. 밭에 씨를 심고 가꾸면 자라난 후에 큰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라도 빠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씨가 없어요. 그럼 아무 것도 없는 밭만 열심히 가꾼다고 수확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씨가 있는데 심을 밭이 없어요. 그러면 물을 줄 수도 없고 가꿀 수도 없습니다. 씨가 있고 밭이 있어서 씨를 밭에
심었지만 물도 주지 않고 가꾸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조금 자라다가 시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복종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복종,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 기쁜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를 통해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わたしの枝で実を結ばないものはすべて、父がそれを取り除き、実を結ぶものはすべて、もっと多く実を結ぶように、刈り込みをなさいます。
누가복음 6장 43절~45절도 보겠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なく、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ありません。木はそれぞれ、その実によって分かります。茨からいちじくを採ることはなく、野ばらからぶどうを摘むこともありません。良い人は、その心の良い倉から良い物を出し、悪い人は、悪い倉から悪い物を出します。人の口は、心に満ちていることを話すからです。
열매는 정직합니다. 나쁜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버리시지만 좋은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 주는 소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나큰 수확의 기쁨, 30배, 60배, 100배 되는 기쁨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