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39회 사이 좋게 지냅시다

홍성필 2021. 6. 29.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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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회 사이 좋게 지냅시다
2018년 8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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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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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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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이 좋게 지냅시다” 仲良くしましょ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입학식은 3월에 한국에서 했습니다만, 그 해 5월에 일본으로 왔기 때문에 제가 입학식을 했던 학교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합니다. 오히려 제 모교라고 하면 5월에 전학했던 동경 신쥬쿠에 있는 동경한국학교 초등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당시 참 말도 안 듣고 뻑 하면 울기만 했던 저를 많이 보살펴주셨던 당시 1학년 때 선생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동경한국학교는 고등부까지 불어있는데 저는 초등부만 나왔습니다. 그래도 “현해탄 푸른 물결 건너서 울려온다 희망의 종소리……”라는 교가도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역시 똑 같은 교가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더라구요. 참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 더 있었습니다만, 이는 바로 학교 교훈이었습니다. 교훈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자, 힘써 배우자, 사이 좋게 지내자”입니다

참 고풍스러우면서도 기본적인 말이죠?

나라를 사랑하자, 힘써 배우자, 사이 좋게 지내자.

이 세상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이 세 마디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사랑해야죠. 힘써 열심히 배워야죠. 그리고 사이 좋게 지내야죠.

그런데 저는 이 세 가지를 보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더하자는 것은 아니에요. 어찌 보면 그야말로 황금비율. 완벽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교훈이지만 2% 아쉽다고 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거나 외국에 있거나 우리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첫 번째이고,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힘써 배우는 것이 두 번째이고, 학교는 또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세 번째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저는 어쩌면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이 좋게 지내자>가 아닐까 합니다.

인터넷에서 <사이 좋게 지내자>를 찍어서 검색을 해보니까 대부분이 유치원, 초등학교…라는 식으로 주로 어린 아이들에 대한 사진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만 사이 좋게 지내면 되나요? 사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입니다.

<사이 좋게 지내자>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어디 동경한국학교 뿐이겠습니까? 수많은 학교에서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되어 어른이 되면서 이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우리 머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디를 보더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아니라,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분명 그 분들도 어렸을 때에는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 것이지요.

좋아요. 열심히 공부합니다 힘써 배웁니다. 그래서 고위공직자들이 되었습니다. 공직자들이 되면 공무원 윤리헌장, 공무원 윤리헌장 실천강령, 공무원의 신조 5개항 등을 배우겠지요. 여기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헌신도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된다, 민족의 선봉이 된다, 국가의 역군이 된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국민의 귀감이 된다, 겨레의 기수가 된다……라고 하는 대단히 훌륭한 말들은 있습니다만,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 <사이 좋게 지내자>가 빠졌습니다.


힘써 배웠죠.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하자는 생각은 머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서로 치고 박고 싸웁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끊임없이 서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이 서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참 이 정치인이라는 사람들도 보면 참 딱하고 가엾은 직업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국회에서 상대방 칭찬하는 것 보신 적 있으세요?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그렇습니다. 이를 두고 그 분들은 논의를 한다고 하는데, 물론 여러 가지 특혜도 있고 대우도 받고 하겠습니다만, 참 하기 힘든 직업 중 하나가 이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들은 서로 비판만 하나요?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하지요. 누구한테서 비판을 받냐 하면, 동료 의원들한테서 만이 아니라 언론이나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보면 참 정치를 좋아해요. 여러분들께서는 혹시 페이스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페이스북을 하고, 이를 통해서 주일 설교 내용이나 선교후원을 해주신 분들을 적어 올리고 있습니다만,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페이스북은 정치인이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아저씨들이 자기들 이야기를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정치 이야기가 참 많이 올라오는데, 이건 그냥 제가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건가 했습니다만,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들이 참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들 중에는 정치를 하는 분들도 계시고 한데, 뭐 그 분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 직업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사람들도 무슨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정치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무슨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건 뭐 난리가 아닙니다. 참 그 분들도 바쁘게 사는 분들일 텐데, 언제 그런 시간을 내서 긴 글을 써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몇 년 전에 썼던 글까지도 다시 끌고 와서 올리고 그럽니다. 그런 글들을 보면 99% 이상이 누군가를 아니면 무언가를 온통 비판하는 글들 투성이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댓글이 달리고, 거기서 논쟁이 시작되고 뭐 그러는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글들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또 그 글로 인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 관료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 글을 그 비판 당하는 당사자가 읽어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애기는 다르죠. 당신은 이런 부분이 잘못 됐으니까 이것을 고치시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그 글을 보고 나서, 아, 맞네. 고쳐야겠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그런 글들을, 그 글들의 상대방인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읽습니까? 정말 일간지 신문 기고란이나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같은 데에 출연해서 말하거나 한다면 모를까, 일개 개인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을 그 사람들이 읽어볼 리가 만무합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문인은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중국 위정자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들이 제 글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 채 오늘도 보니까 얼마나 많은 비판 글이 올라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럴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욕해서는 안 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옛날에 대통령을 욕하면 잡아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로 뽑은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허용되고 보장되어야 하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상대방이 알아 듣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본인이 글을 읽을 확률은 0%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글을 이렇게 열심히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알 것도 같더라구요. 아마도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큰 착각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착각이냐 하면 바로 상대방을 비판하면 내가 상대방보다 나은 존재로 평가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인 것입니다.

누구는 정치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는 권력투쟁이다. 야당은 정권을 빼앗기 위해서 투쟁 하고 여당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나치게 과장된 말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무조건 상대방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 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뺏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페이스북에서 당사자가 읽을 리 만무한 비판글들을 올리는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이는 바로 내가 어떤 유명 인사를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보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정치나 사회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어찌 보면 정치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자기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비판이나 비난을 하게 되다는 것은 그 근원에 무엇일 깔려 있냐 하면, 여기에는 정치나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바로 자기 자신을 좀 좋게 보이려고 하는 과시욕, 또는 교만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경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판이 무엇이에요? 나는 옳고 너는 잘 못됐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시골 동네 술집에 가보라는 거예요. 거기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하룻밤에도 세상이 세 번 이상 바뀐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 요즘 정치 글러먹었어. 대통령은 누가 되어야 하고 장관은 누가 되어야 하고, 이걸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걸 저렇게 해야 하고……라고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아니야, 저건 저렇게 하고 그건 그렇게 하고……그런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어떠세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모자란 것도 같고 그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생각도 중요하죠.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들도 자기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 더구나 초선이 아닌 몇 선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보면,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슨 행사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보통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일도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정치인들을 두둔하거나 비판하거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이웃입니다.

한 달쯤 전에 제가 처음으로 팟캐스트를 등록하기 위해서 그 동안 주일 설교 내용들을 다시 정리할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면서 저 스스로가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발음이 나빠서라거나 내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에요.


이런 말씀 드리기가 적지 않게 창피합니다만, 참 말을 잘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듣고 있으니까 참 맞는 말만 해요. 이왕 창피한 김에 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제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저 자신도 은혜를 참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말을 누가 하고 있어요? 예, 바로 저 자신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아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들을 들으면서 제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야……이 친구야……너냐 잘해……

그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그것은 바로 상대방한테 충고를 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더 쉬운 일은 바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비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오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옆에 서 보는 사람들도 비판하는 사람이 훌륭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착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는 바로 교만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상대 후보를 칭찬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がさばく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あなたがたが量る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量られるからです。

비판과 비난에는 교만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는 비단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바로 나와 내 이웃 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기간을 대략 3년에서 3년 반 정도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절대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은 이른바 산상수훈이라는 말씀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말씀, 전하셔야 할 말씀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왜 갑자기 이처럼 <비판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시간이 남아서 좀 시간을 때우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바로 천국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다른 사람들한테 쓴 소리를 하지요? 하지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말, 어떤 분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겠고, 또 어쩌면 직접 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 그런 말 하기 싫었어요? 그래도 상대방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었어요?

그래요. 그 진의를 제가 의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비판을 하면 똑 같은 비판을 네가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それで、何事でも、自分にしてもらいたいことは、ほかの人にもそのようにしなさい。これが律法であり預言者です。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안 좋게 대우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안 좋게 대우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대접해주면 좋은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해주면 좋아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 깔린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나와 상대방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무슨 청문회 같을 것을 하는데 기억에 남는 인사청문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두 사람은 정말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올 줄 알았습니다만, 국회의원들이 집요하게 밝혀내더라구요.

그래도 물론 본인이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그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세상에, 이런 저런 내용들을 집요하게 물으니까 본인들이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느낌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저 사람들도 역시 똑 같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었지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요한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놀라서 경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때 그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そこで、私は彼を拝もうとして、その足もとにひれ伏した。すると、彼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あか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拝みなさい。イエスのあかしは預言の 霊です。」

이 모습을 보면 천사도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높임을 받으실 이, 경배를 받으실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일개 사람인 주제에 어차피 똑 같은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애써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교만이 되겠습니까.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그저 단순히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교만을 반복해서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21절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あなたは、あなたの仰せから迷い出る高ぶる者、のろわるべき者をお叱りになります。

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高ぶりは破滅に先立ち、心の高慢は倒れに先立つ。


예레미야 50장 32절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そこで、高ぶる者はつまずき倒れ、これを起こす者もいない。わたしは、その町に火をつける。火はその回りのものをすべて焼き尽くす。」

이 외에도 교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구절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비판은 교만입니다. 비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독차지 하겠다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하는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하는 나 자신의 교만을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요한복음 15장 9절~10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の中にとどまりなさい。
もし、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戒め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愛にとどまるのです。それは、わたしがわたしの父の戒めを守って、わたしの父の愛の中にとどま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

내 안에 있는 교만을 물리칠 힘은 오로지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가도 되고, 안 가도 됩니까? 구원을 받아도 되지만, 안 받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반드시 천국에 가야만 합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물리쳐도 되고, 안 물리쳐도 됩니까? 우리 이웃을 사랑해도 되고 사랑 안 해도 됩니까? 여기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만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교만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를 봅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ほんとう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のならばです。まさしく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うなら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滅びて行く古い人を脱ぎ捨てるべき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心の霊において新しくされ、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り出さ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ことでした。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비판이라는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미움이라는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이는 모두가 교만이라고 하는 유혹, 자기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랑이라는 새 사람, 용서라는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단순히 권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고 힘써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게 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비판하려 하지 맙시다. 비판 대신 서로를 사랑합시다. 주님 안에서 사이 좋게 지냅시다. 그리하여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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