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神様の中での勝負師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월 9일에 평창에서 개최된 한국 최초 동계올림픽도 이제 오늘 저녁이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참 여러 가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상했던 대로 좋은 성과를 올려준 낸 경기도 있었나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종목에서 뜻밖의 메달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좋은 소식만이 있을 수야 없겠지요. 분명히 이 종목에서는 메달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하는데 아쉬운 결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올림픽처럼 세계적인 경기를 할 때에는 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예를 들어서 한국이 어느
나라와 축구를 한다고 하면, 뭐 굳이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나라 골이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와~ 하는 함성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국에 살고 있다 보면, 예를 들어서 쇼트트랙은 우리나라의 효자 종목입니다만 일본은 그리 강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보려고 했더니만 해외에서는 또 볼 수 없게 되어 있더라구요? 참 여러 가지로 아쉬운 부분이
많지요.
반면에 아주 잘 보여준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에서도 대단히 인기를 끌고 있는 컬링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일본에서도
잘 볼 수가 있었어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예, 일본도 이번에 대단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죠. 특히 지난 금요일에
한국과 일본, 한일전은 대단히 멋진 경기였습니다. 그와 같은 선수들을 보면 경기를 할 때의 표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특히 여성
선수의 경우에는 아무리 곱상하고 귀엽게 생긴 선수라 하더라도 경기가 일단 시작만 하면 그야말로 표정이 승부사처럼 돌변합니다. 여자
컬링의 안경선배 김은정 선수 보세요. 평소에는 정말 참 밝은 얼굴인데 경기에서 투구할 때보면 정말 눈에서 불이라도 나올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승부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기기 위해서는 승부사 기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승부사 기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반드시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상대방을 이기고야 말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이런 강한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비단 스포츠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제 대학 동기들 중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가끔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을 보면, 자기는 아무래도 승부사 기질이 있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재판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겠다는 그런 집념이
강하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죠. 뭐, 여러 경우가 있긴 하겠습니다만, 일단 재판이 시작 되었다면 이기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겠지요. 아무리 성실하고 아무리
머리가 좋고 아무리 노력을 열심히 하는데 맨날 재판에서 지기만 해봐요. 그 변호사가 어떻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재판도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그야말로 승부사 기질, 반드시 이긴다, 기필코 이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긴다……라는
식으로 승리에 대한 집착, 집념 같은 것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어떠냐 하면, 저는 이른바 승부사 기질이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가 형제가 없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하십니다만, 글쎄요. 원인이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승부사 기질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가끔 그런 말을 듣습니다만, 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제가 어느 친척집에 갔었는데 거기 집에서 먹을 것을
주었대요. 그런데 어떤 아이는 누가 뺏어 먹을 까봐 열심히 집어먹고 있는데, 저는 그 먹는 걸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하기사 그런 면에서 보면 제게 형제가 없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무슨 먹을 게 있는데 형제가 있으면 누가 뺏어먹을까봐 내가
먼저 먹어야 하는데……하면서 서로 막 열심히 먹는다고 하는데, 저는 형제가 없다보니, 무슨 맛있는 게 있다 해도 설마 부모님이 제걸
빼앗아가시겠어요? 그러다보니 무슨 경쟁심이나 경계심이 없었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오늘은 이삭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 살펴볼까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이
사라와 결혼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 아니,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서 이제는 포기했던 아이, 그러나 100세가 되어서야 얻을 수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정작 이 이삭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 보면
조금씩 나오기는 해요. 하지만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의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좀 많이 등장하는 곳이라고 하면 바로 오늘 본문이
있는 창세기 26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26장에 보면 이삭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2절~15절을 보겠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イサクはその地に種を蒔き、その年に百倍の収穫を見た。主が彼を祝福してくださったのである。こうして、この人は富み、ますます栄えて、非常に裕福になった。彼が羊の群れや、牛の群れ、それに多くのしもべたち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で、ペリシテ人は彼をねたんだ。それでペリシテ人は、イサクの父アブラハムの時代に、父のしもべたちが掘ったすべての井戸に土を満たしてこれをふさいだ。
이삭이 당시 그랄 땅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하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복을 주셨냐 하면 그가 농사를 짓는데 심은 것에
비해 100배나 얻었다는 것이에요. 10만원어치를 심었다면 1000만원어치를 거뒀다는 것이고, 100만원어치를 심었다면 1억원어치를
거두었다는 것이니 얼마나 큰 축복이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항상 축복을 주시니 이삭은 마침내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대요? 예, 그 지역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보고 시기해서, 세상에,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때에 팠던
그의 우물을 메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우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메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누가 우리 집 수돗물을 못 나오게 해버렸어요.
사실 그것만 가지고도 정말 화가 날 만한 일입니다만, 오늘 성경에서 당시 우물을 메워버렸다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전기, 수도, 가스를 끊고, 자동차를 빼앗아버리고 일자리도 잃게 되었을 정도로,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다음과 갈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6장 16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そうしてアビメレクはイサクに言った。「あなたは、われわれよりはるかに強くなったから、われわれのところから出て行ってくれ。」
아비멜렉은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도 역시 이삭에게 그 땅을 떠날 것을 명합니다. 당시 그 지역은 블레셋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아비멜렉 또한 블레셋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것 때문이었겠지요. 지금 우리
블레셋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러다가 내가 다스리는 지역에 난리가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떠나라. 지금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지역은 아브라함 때도 살았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면서 세금도 냈겠지요. 나름대로 공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길 떠나라고 하니, 이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목숨 걸로 싸워도 시원찮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이삭이 분을 내어 일어서더니 아비멜렉과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웠더라……라고
기록하나요?
아니요. 그 다음 구절을 봅니다.
창세기 26장 17절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イサクはそこを去って、ゲラルの谷間に天幕を張り、そこに住んだ。
이게 뭐예요? 반박 한 번 안 해보고 오랜 세월 동안 지내왔던 그 곳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또 우물을 팠는데,
20절에 보니까 역시 또 그랄 지역의 목자들이 와서 말하기를 기껏 판 우물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겼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을 봅니다.
창세기 26장 21절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しもべたちは、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ところが、それについても彼らが争ったので、その名をシテナと呼んだ。
여기서 다투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 쪽이 빼앗으려고 하는데 이를 안 빼앗기려고 싸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이의제기를 해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죠.
여기까지 오면 그래도 한 번 쯤은 싸워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하고 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도대체 몇 번이나 당하면서 삽니까.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인 2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ほかの井戸を掘った。
이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여러분, 이게 지금 남 이야기니까 아, 그래? 뭐 그런가보지……하고 끝나는 것이겠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친구가 이렇게 해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장사를 해왔는데, 장사가 좀 잘 되니까 해코지를 해요. 막 거기서 장사를 못 하게 합니다.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일해온 회사예요. 제가 막 좋은 성과도 많이 내고 승진도 빨리 하니까 동료들이 나를 시기해서 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싸워야죠. 그런데 싸우지도 않고, 나가란다고 나가요? 그게 말이 됩니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 부분을 읽으면요, 정말 속 터집니다.
하지만 마지막 22절을 끝까지 봅니다.
창세기 26장 22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ほかの井戸を掘った。その井戸については争
いがなかったので、その名をレホボテと呼んだ。そして彼は言った。「今や、主は私たちに広い所を与えて、私たちがこの地でふ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
밀리고 빼앗기고 양보하고 나서 네 번째로 우물을 팠더니만 이제 아무도 빼앗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를 르호봇レホボテ, <넓은
곳>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뭐 한 마디 싫은 소리라도 할 것 같은데, 빼앗는 사람한테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한테도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냐고 불만을
토했다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왜 이랬을까요. 원래 이삭은 순진했으니까요? 인간성이 좋았기 때문에요?
ㅎㅎ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온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몇 살일 때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바로 앞장인 25장을 보면 이미 야곱이 태어나 있었습니다.
25장 26절에 의하면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얻은 것은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물을 빼앗기는 일을 겪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 이삭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삭이 75세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삭이 태어나고 60세 이상이 될 때까지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계속해서 보면서
살아왔을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겠지요.
아브라함과 이삭이라고 하면 우리는 무엇보다 모리아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창세기 2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 어렵사리 얻은 아들입니다.
얼토당토 않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아무런 반박도 안 하고는 그저 온전히 순종을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이삭은 어땠을까요. 아브라함을 따라서 모리아산까지 함께 갔던 이삭의 당시 나이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습니다만,
창세기 22장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2장 6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アブラハムは全焼のいけにえのためのたきぎを取り、それをその子イサクに負わせ、火と刀とを自分の手に取り、ふたりはいっしょに進んで行った。
당시 번제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에는 양이나 염소 같은 큰 짐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불로 태울 만한 나무가 필요했을 텐데,
고작 나뭇가지 서너개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겠지요. 적어도 상당한 양의 나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이삭이 지우고 갔을
정도라고 하면, 적어도 초중학생 정도 가지고는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이삭의 나이는 25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때 이삭의 나이가 정확하게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부분은, 이삭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아브라함을 뿌리칠 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2장 9절~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ふたりは神がアブラハムに告げられた場所に着き、アブラハムはその所に祭壇を築いた。そうしてたきぎを並べ、自分の子イサクを縛り、祭壇の上のたきぎの上に置いた。アブラハムは手を伸ばし、刀を
取って自分の子をほふろうとした。
아브라함이 이삭을 완전히 결박하고 난 다음에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면 그건 뭡니까. 이미 그는 아, 아버지가 나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구나……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순종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스톱! 그 아이한테 손 대지 마! 이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22장 13절~14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アブラハム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角をやぶにひっかけている一頭の雄羊がいた。アブラハムは行って、その雄羊
を取り、それを自分の子の代わりに、全焼の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た。
そうしてアブラハムは、その場所を、アドナイ・イルエと名づけた。今日でも、「主の山の上には備えがある」と言い伝えられている。
여호와 이레. アドナイ・イルエ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신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분이시구나. 내가 노력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잘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제 이삭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달았어요? 예,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았더니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준비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삭은, 지금 눈앞에서 우물을 빼앗긴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요? 더 좋은 곳에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생을
통해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삭의 삶에 대해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을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예, 바로 그의 아들 야곱입니다.
물론 이삭에 대해서 야곱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어쩌면 이삭의 삶을 보면서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냥 순진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좀 더 열심히 노력해보면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야곱, 그는 먼저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장자의 명분 長子の権利 을 형 에서 エサウ 한테서 빼앗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형이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의 어머니 리브가 リベカ의 지혜를 동원해서 가로챕니다. 그 결과 축복을 받기는커녕 자신의
형 에서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망쳐 나온 야곱이 자신의 부인을 얻을 때에는 어땠나요. 야곱은 라헬 ラケル 을
얻으려고 7년 동안이나 무료로 노동을 해야 했으나, 그 결과 라헬을 얻기는 얻었으나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레아 レア까지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7년이나 더 보수도 받지 못하고 노동을 해야 했지요.
그렇게 해서 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얻습니다만, 자신이 사랑한 여인인 라헬 ラケル 이 낳은 아들 중 요셉은 어렸을 때 행방불명이
됩니다. 딸 디나 ディナ는 이민족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시므온 シメオン과 레위 レビ는 세겜シェケム이 사는 성읍 모든
남성들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곱더러 네가 축복을 받으려면 네 지혜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네 형과 네 친척들, 네 이웃한테서
빼앗아라. 그래야 네가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나요?
창세기 25장 22절~23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子どもたちが彼女の腹の中でぶつかり合うようになったとき、彼女
は、「こんなことでは、いったいどうなるのでしょう。私は」と言った。そして主のみこころを求めに行った。
すると主は彼女に仰せら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他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여기서 두 민족이라고 하신 것은, 에서는 에돔족속이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즉
에돔이 이스라엘 민족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언제 하셨어요? 예,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이는 어디 말씀을 인용한 것인가 하면 말라기 マラキ書 1장 2절~3절 말씀입니다.
말라기 1장 2절~3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マラキ書1章2節~3節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愛している」と主は仰せられる。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あなたが私たちを愛されたのですか」と。「エサウはヤコブの兄ではなかったか。――主の御告げ――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た。
わたしはエサウを憎み、彼の山を荒れ果てた地とし、彼の継いだ地を荒野のジャッカルのものとした。」
여기에도 하나님께서는 형인 에서를 미워하고 동생인 야곱을 사랑했다고 하십니다만, 그 이유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상해요? 말이 안
되요? 불공평해요? 예, 맞습니다. 이상합니다. 말이 안 됩니다.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하고 말이 안 되고 불공평한 사실을
말씀 드릴까요?
おかしい、納得がいかない、不公平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고,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까.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것입니까.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요? 우리가 그만한 일을 했나요? 우리가 그런 엄청난 하나님을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했나요? 세상에서
우리가 그토록 의인인가요? 훌륭한 인물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요, 이것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요, 이것이야말로
불공평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감사요, 이것이야말로 은혜인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승부사는 자신의 노력을 믿습니다. 자신의 수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믿습니다. 자신의 방법을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믿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갖고 승부에 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승부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과 수단과 지혜와 방법과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려 했던 야곱의 일생은 어땠습니까.
애굽 왕 바로를 만난 자리에서, 나이를 묻는 왕의 질문에 야곱은 답합니다.
창세기 47장 9절을 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ヤコブはパロに答えた。「私のたどった年月は百三十年です。私の齢の年月はわずかで、ふしあわせで、私の先祖のたどった齢の年月には及びません。」
나 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내 능력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좀 제 상상을 덧붙이자면, 적어도 내 아버지처럼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삶, 아버지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했어요. 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땠어요? 예, 험악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승부사로만 살아가려 한다면, 그 순간은 이긴 것 같고,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더 많이 얻은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것이 바로 험악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세상적인 승부사가 자신의 노력과 수단과 지혜와 방법과 경험과 능력을 의지한다면,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신다. 아멘!
이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닌,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닌, 나를 사랑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의 승부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순간 어떻게 된다고요?
예, 지금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잘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요, 지금 잘 안 되더라도 나중에 잘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한테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내가 잘 하면 성공이고 내가 잘 못하면 실패입니다만, 우리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도 성공이고 저렇게 되도 성공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조금 어렵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거나 다투실 필요가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이 순간도 인도해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승부사가 되어서,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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