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준비된 감사” 備えられた感謝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특별히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교회에 조금 다녀보신 분이라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매우 익숙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ものは信仰と希望と愛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그 앞에는 마음은 반드시 <감사>라고 하는 마음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께 대한
감사가 없이 어떻게 믿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모두 해결해주셨고, 우리를 멸망 속에서 건져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셨다는 감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절망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절망 속으로 가고 마는 미래인데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거저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징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맞을 채찍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으시고 우리가
받을 죽음과 멸망과 저주와 심판을 모두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져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귀하신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이 아닌 소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습니까. 옛날에 제가 붓글씨를 배울 때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쓰라고 하지 않습니다. 글씨를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글씨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조건 잘 쓰라고 하면 그게 되나요? 그래서 반드시 옆에 샘플을 놓고 그대로 따라서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우리 모습이 어땠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救いはユダヤ人から出るのですから、わたしたちは知って礼拝していますが、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で礼拝しています。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예배해야 하는지, 무엇을 경배해야 하는지,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사람의 손으로 조각을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신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고 절을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는지,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는지, 과거에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으로만 말씀해주셨으나,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지나쳐버린다면 이 사랑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감사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있어야 믿음이 있을 수 있고, 감사가 있어야 소망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감사가 있어야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각 나라에는 그 나라 국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한국의 경우에는 국민의 4대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 안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지 말라고 해도 기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복을 우상들을
향해 빌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선물을 준다든지 친절을 베풀어주면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기뻐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기뻐할 일도 아닌데, 아니, 남들이 보기에는 시련일 수도 있고 문제일 수도 있고 또는 어려움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는 기뻐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뻐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아쉬울 때만 기도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쉬지 말고 하라고 하기에
누구는 기도를 믿음 안에서 호흡이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참 맞는 비유이죠. 숨 쉬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귀찮으면 며칠
건너뛰고 그럴 수 있나요? 그러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반드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길을 갈 때나 혼자 있을 때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얼마나 귀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범사가 무엇입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누가 나한테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만? 누가
나한테 선물을 줬을 때만? 아니요. 범사란 언제든지, 어떤 일에 있어서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는 사랑이 제일이지만,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 중에서는 저는 감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가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기 때문에 믿음을 지킬 수가
있고, 감사가 있기 때문에 소망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며, 감사가 있기 때문에, 감사로 넘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좋은 일도 아닌데, 전혀 기뻐할 일도, 전혀 감사할 일도 아닌데 우리는 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5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神が造られた物はみな良い物で、感謝して受けるとき、捨てるべき物は何一つありません。神のことばと祈りとによって、聖められるからです。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기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은 3가지, 과거의 감사, 현재의 감사, 그리고 미래의
감사……이렇게 3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과거의 감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는 물론 좋은
일도 있었을 것이고, 기쁜 일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 뿐인가요? 서운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일이나 좋은 일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려웠던 일이나 괴로웠던 일은 어떠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래 뭐 옛날 일이니까 그 때는 좀 힘들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야……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아직도 분이 안 풀려서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병에 걸린 적이 있으십니까. 그 때는 그랬어도 하지만 지금은 회복되어서 이 자리에 계시잖아요. 돈을 많이
잃으셨나요? 얼마나 잃으셨습니까. 많이 잃으셨습니까. 하지만 더 많이 잃지 않는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사람한테 상처를 받으셨습니까. 그 때 받은 상처를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라고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면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정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도 남을 일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하이고, 정말 내가 왜 그 때 그랬을까, 이랬을까 하고 생각을 하면 밤새도록 후회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항상 후회해라? 쉬지 말로 후회해라? 범사에 후회해라? 아니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후회하시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상처, 우리가 가진 괴로움, 우리가 가진 고통들을 주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로하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픔, 지난 날의 상처를
보듬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의 감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리 평탄하거나 아무리 순탄할 때라 하더라도
조금도 고민이 없거나 문제가 없었던 시기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어느 정도의 문제는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가진 것은 똑같습니다. 똑 같은
자동차에 똑 같은 수준의 재산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똑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행복했고 다른 한 사람은 불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족,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내게 주어진 직장이나 환경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니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항상 부족해했습니다. 이웃이나 옆집을 보고는 부러워합니다. 가족도 맨날 웬수 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게 없는 것만 바라봅니다. 교회에 가면 뭘 해. 나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데…… 그렇게 되니 당연하게도 불평 불만이
쌓여갑니다. 그러니 어떻게 거기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
するのはやめなさい。こういうものはみな、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な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それがみなあなたがたに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だから、神の国とその義とをまず第一に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に加えて、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与えられます。
여기서 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히 부족한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불평 불만 염려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구하라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이에요.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 나라는 무엇이에요. 그렇습니다. 천국,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곳입니다. 우리의
목적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최종목표는 이 땅에서 어디까지 출세하느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재산을 많이 모아놓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침내 가야 할 곳은 천국인 것입니다. 바로 그 천국에 가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를 구하라는 것은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좀 어렵죠? 조금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군대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강단에서 직접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고참이 어떤 황당한 행동을 해도 그것은 작전이다……그러니까 졸병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믿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생각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사야
55장 9절을 봅니다.
이사야 55장 9절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天が地よりも高いように、わたしの道は、あなたがたの道よりも高く、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よりも高い。
아무리 지혜가 많고 생각이 깊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고
하나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이 누구 편이에요? 그렇죠. 바로 우리 편이 되십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 생각을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온맘다해”라는 찬양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찬 양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 가사가 있습니다.
“나 염려하잖아도 내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그 때 그 때 모두 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걸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이렇게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미처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높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는 어떠한 문제가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현재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창세기 12장 1절~4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v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の名は祝福となる。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わたしは祝福し、あなたをのろう者をわたしはのろう。地上のすべての民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お告げになったとおりに出かけた。ロトも彼といっしょに出かけた。アブラムがハランを出たときは、七十五歳であった。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만을 믿고 무작정 나섭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어요. 그런데 이삭을 가졌을 때가 몇
살이요? 백 세 때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몇 년이에요? 25년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려 25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하지 않아요. 그냥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 하죠.
정말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출애굽 당시 모세를 따라 나선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땠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입에서 불평 불만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축복 받는 사람과 축복 받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감사와 현재에 대한 감사를 알게 된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감사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감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언제든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감사할 준비를 갖춘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하실 때, 아이구…얘를 또 괜히 썼다가 좌절하면 어쩌나…절망하면 어쩌나…믿음이 약해지면
어쩌나……얼마나 걱정이 많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손때, 예수님의 손때가 많이 묻은 삶이라면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넘치는 감사와, 그리고 항상 준비된 감사를 가지고, 미래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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