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92회 강을 건너야 합니다

홍성필 2021. 6. 27.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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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회 강을 건너야 합니다
2017년 8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17절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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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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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강을 건너야 합니다” 川を渡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 어떻습니까. 평탄한 길을 가고 계신가요? 아니면 좀 길이 울퉁불퉁한가요? 요즘은 다행히 그런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만, 예전에 동경에 살 때 보면 주말에 어디 좀 가려고 하면 고속도로도 그렇고 일반 도로도 그렇고 길이 꽉 막힙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하네다 공항에 갈 때 일인데, 출발을 넉넉히 해서 시간이 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고속도로로 잘 가면 될 것을,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하는 수 없이 동경 시내에서 한 번 고속도로를 내려서 반대방향으로 다시 타야 할 일이 생기고 말았는데, 와……이게 웬일입니까. 길이 보통 막히는 게 아니에요. 저기 100미터 앞에 신호등이 보이는데, 차가 안 빠집니다.

파란색으로 바뀌긴 바뀌어요.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호등이 한 두 번 바뀌면 그제서야 몇 미터 움직이는 정도입니다. 야~ 이건 정말 인내심 테스트더라구요. 물론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서울 시내는 무척이나 막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온지 얼마 안되었다면 그나마 뭐 그러려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군마현에 살다가 동경에 그 도로정체를 겪으니까 정말 참 심리적으로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체가 심하다 하더라도 조금씩 움직이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약에 앞에서 사고라도 나보세요. 오히려 일반 도로라면 다른 길로 돌아갈 수야 있겠습니다만, 고속도로라고 한다면 꼼짝없습니다. 잘못하면 몇 시간씩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고달픈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어떻습니까. 사업을 하는데 경기가 별로 안 좋아서 수입이 조금 줄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는데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어서 스트레스가 쌓여요. 우리 생활 속에서 가족이나 친척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불편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 자신한테 무슨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일들이 풀리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업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적자는 아니고, 직장생활이 좀 힘들어도 월급은 들어오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랑 관계가 조금 불편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무슨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우리 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는 못하겠지요.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다니고 그래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 먹으면서 치료를 받으면 살아갈 만 해요.

이 정도 수준이면 길이 좀 울퉁불퉁하거나 길이 좀 좁아서 쌩쌩 달릴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완전히 힘든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힘든 상황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앞길이 꽉 막혔을 때입니다. 앞에 빨간 신호등이 보일 때는 그나마 다행이에요. 왜요? 그 신호등은 언젠가는 파란 신호로 바뀔 것이고, 한 번에 저 신호를 못 지나가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저 교차로를 지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문제는 신호등도 없고 자동차도 없어요. 그런데 뭐예요? 앞으로 가는 길이 더 이상 안 보여요.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숲으로 우거져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수익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문을 닫게 생겼어요. 직장생활을 하는데 잘리게 생겼어요. 아니면 갑자기 전혀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발령이 났어요. 인간 관계에서 예상치도 못한 큰 문제가 발생했어요. 또는 건강 상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해요.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니, 왜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영어로는 <why me> 라고 해요. 이런 문제들? 그래, 이런 문제들이 일어났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봤어. 신문이나 뉴스, 잡지 같은 데에서 여러 번 봤어. 내가 아는 사람한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그래, 그 때는 참 딱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지. 아니,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이런 일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면 일어났지,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인줄 알았어.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겨서 내가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문제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한테는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나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만사형통이요, 아무런 문제들도 일어나지 않나요? 이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들이 일어나지 왜 안 일어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낙심합니다.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대로 끝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제가 오늘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라는 생각을 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탓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그래. 분명히 알고 계실 거야. 아니,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혹시 하나님은 내가 괴로워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걸까?”

사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아니요.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것은 마귀 사탄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第一ヨハネの手紙4章16節
「私たちは、私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いる者は神のうちにお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おられます。」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냥 사랑이 많다는 것도 아니요 사랑 그 자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여러 문제들 가운데에 놓이게 됩니까.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년도 아니요, 40년도 아닌, 무려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당장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만군의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지체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땠습니까. 이 애굽 왕이 바로가 좀처럼 내보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이적들을 보고서도 자기의 그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참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납득하기도 힘든 상황이지요. 성경에서는 천지를 만드시고 전 우주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아무리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 바로 고집 하나 못 꺾으세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나요?

출애굽기 10장 1절~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出エジプト記10章1節~2節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パロのところに行け。わたしは彼とその家臣たちを強情にした。それは、わたしがわたしのこれらのしるしを彼らの中に、行なうためであり、わたしがエジプトに対して 力 を働かせたあのことを、また、わたしが彼らの中で行なったしるしを、あなたが息子や孫に語って聞かせるためであり、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あなたがたが知る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바로 고집을 못 꺾어?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들을 구원할 거야. 바로가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은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야. 이유가 뭔지 알아? 그것은 너희들만이 아니라 너희들의 아들과 자손들한테까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떠세요? 아, 그래, 우리한테 지금 어려움이 닥치고 있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나만이 아니라 내 자손들한테까지도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러시는구나……그래. 그렇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감수해야겠구나. 할렐루야~!!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믿음이 좋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 지금 내가 목이 마르다고 하는데, 어서 빨리 물을 주시든지 하시지, 무슨 자손들한테 하나님 이름을 어쩌구 하고 계세요. 알았으니까 우선 그 물이나 주고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중 일은 그 다음에 말씀하세요……이게 바로 솔직한 심정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성경에 보면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 앞에 길이 두 번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언제인가 하면 애굽을 탈출하고 불과 며칠 갔더니 그 눈 앞에 홍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적해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0절~12절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v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出エジプト記14章10節~12節
パロは近づいていた。それで、イスラエル人が目を上げて見ると、なんと、エジプト人が彼らのあとに迫っているではないか。イスラエル人は非常に恐れて、主に向かって 叫んだ。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は墓がないので、あなたは私たちを連れて来て、この荒野で、死なせるのですか。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私たちにしてくれたのです。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애굽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봤는데도 불구하고, 조상 대대로 400년 동안 종살이라고 시달려왔던 애굽을 탈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좇아오는 것을 보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자 무슨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냥 애굽에서 죽게 내버려두지 왜 괜히 광야로 이끌어 나와서는 여기서 죽게 하느냐,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것보다 차라리 종살이를 하는 게 낫다고 난리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서, 일부러 아주 살아가기 힘들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광야로 이끌어낸 것이에요? 광야로 이끌어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 세상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을 해방시켜주었다는 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면서 젖어 있던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그래 이래 살다가 죽지 뭐>

그렇다면 지금은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없나요? 아니요. 있습니다. 너무나 많습니다. 요즘 세상에서의 노예근성 그것은 바로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세상적인 방법에 사로잡힌 노예근성인 것입니다. 인생 별거야? 그냥 적당히 놀면서 적당히 즐기면서, 적당히 살다가 가면 되는 거지, 무슨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야. 일요일은 집에서 잠이라도 자던가, 아니면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지 무슨 교회고 예배야?

이것이야말로 노예근성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노예로 살면 그게 편하게 생각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편한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봤자 조금 높은 노예에 불과하지 구원받은 자유인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자유>도 <믿음>도 <기도>도 <구원>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셔야 해요? 그렇죠. 가르쳐야죠.

이스라엘 민족은 기도도 안 했습니다.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바로 특별서비스입니다.


특별서비스. 듣기는 좋죠? 기도도 안 했고 믿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수 십만, 수 백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믿음이 없는 그들 눈 앞에도 참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누구는 이 홍해가 갈라진 것이, 무슨 밀물 썰물 할 때 썰물처럼 물이 줄어들어서 그 한 가운데에 길인 난 것처럼 말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요즘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있거든요. 그리고 또 누구는 이것은 바다가 아니라 갈대 숲 사이를 지나온 것이 마치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무슨 번역 오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왜 한 구절만 봅니까. 왜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그 한 부분만 봅니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해 봅니다.

출애굽기 14장 22절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出エジプト記14章22節
「そこで、イスラエル人は海の真中のかわいた地を、進んで行った。水は彼らのために右と左で壁となった。」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를 걸어가고, 물이 어떻게 됐대요? 그냥 평지에 길이 났대요? 아닙니다. 그들 좌우에 물이 벽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와 바다 사이를 이스라엘 민족이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풍경이었을까요.

아무리 믿음이 없고 그랬던 그들도 기뻐했겠지요. 그래서 홍해를 건넌 다음에는 그들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제 감정을 넣어서 말씀 드리자면, 찬양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때요? 얼마 지나자 물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어떻게 해요?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믿습니다. 우리에게 물이 떨어졌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마실 물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던가요?


출애굽기 15장 24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出エジプト記15章24節
「民はモーセにつぶやいて、「私たち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ですか。」と言った。」

믿기는 뭘 믿어요.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하소연입니다. 낙심입니다. 절망입니다. 좌절입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홍해를 건너고 얼마나 지났어요? 한 달 정도 지났을까요? 그래서 그 놀라운 홍해의 기적을 잊어버리고 불평을 한 것일까요?

출애굽기 15장 22절을 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出エジプト記15章22節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홍해를 건너고 얼마가 지났대요? 예, 사흘입니다. 그처럼 놀라운 기적을 자기 눈으로 보고, 그 뿐인가요? 직접 그 마른 땅과 좌우에 벽처럼 막아선 바다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까지 불과 3일 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보면요 계속해서 광야에서는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시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구원해주십니다. 사랑으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광야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에 보면, 물론 예외는 있겠습니다만, 졸업보다는 입학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특히 문과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입학만 일단 해두면 졸업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양 대학을 보면, 물론 좋은 대학은 입학도 어렵습니다만, 그보다도 훨씬 더 졸업이 어렵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가 어느 쪽 제도가 좋고 나쁘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시스템으로 봤을 때 최고명문대학인 광야대학은 아무래도 서양 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믿음도 없었고 기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특별서비스>로 애굽에서 건져내 주시고, <특별서비스>로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언제 누가 하나님더러, 우리의 죄가 무거우니 당신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해서 죽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게 하소서……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한테 <하나님, 우리 죄가 많으니 나를 구원해주세요>라고 기도하니까 누가 나를 전도해서 교회로 데리고 갔나요? 아니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습니다만, 저를 포함해서 재미 삼아 교회에 나가거나, 아무리 모태신자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강한 믿음이 생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서비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가 갈라진 것은 최고명문 광야대학에 들어가긴 위한 입학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광야대학에서 믿음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 속에서 신앙을 배웁니다. 기도를 배웁니다. 구원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이 떨어지면 목이 마르다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물을 나게 하시고,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원망을 끊이질 않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졸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졸업을 안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지, 조금 어려움이 닥친다고 뻑 하면 불평하고 뻑 하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는 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졸업은 늦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불평과 불만에 휩싸인 그들은 광야에서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광야대학에 입학한지 40년 후, 드디어 졸업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의 광야대학 입학식이 홍해를 건너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졸업식은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로부터 전권을 물려받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 11절~13절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ヨシュア記3章11節~13節
見よ。全地の主の契約の箱が、あなたがたの先頭に立 って、ヨルダン川を渡ろうとしている。今、部族ごとにひとりずつ、イスラエルの部族の中から十二人を選び出しなさい。全地の主である主の箱をかつぐ祭司たちの足の裏が、ヨルダン川の水の中にとどまると、ヨルダン川の水は、上から流れ下って 来る水がせきとめられ、せきをなして立つようになる。」

입학식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홍해가 갈라지는 특별서비스가 있었습니다만, 이제 졸업식에는 특별서비스가 없습니다. 물을 가르기 전에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매고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뭐, 강에 들어가는 게 별거야? 바다보다는 낫겠지. 뭐 별거 아니네?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성경에는 친절하게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 전반부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ヨシュア記3章15節 一部
「ヨルダン川は刈り入れの間中、岸いっぱいにあふれるのだが」

그 당시 강은 보통 강이 아니라 물이 한창 불어서, 거기를 걸어서 건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너희들이 먼저 발을 담그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전 이스라엘 자손 같았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광야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요단 강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광야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땠습니까. 단 한 마디도 불평을 안 합니다. 불만을 안 합니다. 절망도 좌절도 안 합니다. 그 누구 하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여호수아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최고 명문인 광야대학을 졸업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제 졸업한 그들은 어떻습니까. 난공불락. 절대로 공략할 수 없다고 하는 여리고성을 단숨에 물리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광야대학을 졸업하고 강을 건넜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말로 <히브리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로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악과 사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특별서비스로 최고명문 광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시련을 겪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 믿음을 키우고, 이 광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큰 축복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에서 보시는 것처럼 불평 불만이 사라지고, 낙심과 실망과 절망과 원망을 버리고, 주님께 대한 순종과 감사로 넘칠 때 비로소 졸업하여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고 하면 사람이 무슨 죽어야지만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언제 죽어야지만 가나안 땅을 차지했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우리가 받을 상이 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 불만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낙심과 실망과 절망과 원망은 우리의 앞길을 더욱 험난하게 만들고 졸업을 늦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 눈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의 특별 서비스로 길이 열리지 않습니까? 축하합니다. 이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크나큰 축복을 받을 날이, 넘치는 축복을 받을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불평이나 불만이나 낙심이나 좌절이나 절망을 모두 광야에 버려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서 하나님이 주시는 크나큰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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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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