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77회 떠남과 버림

홍성필 2021. 6. 27.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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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회 떠남과 버림
2017년 5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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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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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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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떠남과 버림”離れることと捨てる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동쪽인지 서쪽인지 남쪽인지 북쪽인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한테 복을 주어서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생각해보면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습니다. 그것도 무슨 혈기 넘치는 이팔청춘 젊은이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흔 다섯 살 먹은 사람한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아이, 그 때 일흔 다섯은 지금 일흔 다섯이랑 달라. 그 때 일흔 다섯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다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을 하겠습니다만, 제가 계산을 해본 결과, 요즘 나이로 봐서 대략 마흔 다섯 정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0세 정도에 이삭을 낳았다고 본다면 그리 큰 오차는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좀 현실감이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마흔 다섯 살쯤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어떤 자료에 보면 아브라함이 집을 나섰을 때 그의 아버지인 데라는 세상을 떠났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장 26절에 보면,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テラは七十年生きて、アブラムとナホルとハランを生んだ。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창세기 11장 32절에 의하면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の一生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カランで死んだ。

여기에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가 75세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그의 아버지 데라는 145세, 이걸 좀 엉성하긴 합니다만,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지금 나이로 대략 86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년이긴 합니다만 당시 아버지는 분명 살아계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이로 환산해서 대략 마흔 다섯 정도 되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요즘 나이로 마흔 다섯 살, 집에는 여든 여섯이 되는 아버님이 계세요. 부모님이 연로하면 자식이 부양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옛날에는 더했겠지요.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즘 사회에서 40대 중반이라고 한다면 어떤 존재일까요. 회사에서는 중견사원이겠지요? 관리직이긴 합니다만, 실무진과 함께 실질적으로 회사를 견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을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그 나라의 핵심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떨까요? 가족을 부모님을 부양하면서, 이제 안정된 수입과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안락한 노후도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기, 또는 절정기를 준비하는 바로 직전인 매우 중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거기서 떠나라! 거기서 나와라! 내가 인도하는 새 땅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신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그 때까지 쌓아 놓은 실적이나 경력, 배경, 이 모든 것을 단숨에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몇 십 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주저하고 망설였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지금 당장 집을 떠나라는 것일까요? 가출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중에서 창세기 12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その後、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단순히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고향을 떠나고 너희 친척을 떠나고, 그리고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만, 그 전에 잠시 화제를 바꿔볼까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많은 고등학문을 익힌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약에서는 모세를 꼽을 수 있겠으며 신약에서는 바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부터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었고, 왕족으로서의 최고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바울은 지금으로 한다면 훌륭한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말하자면 앞날이 보장된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당시 유대 총독인 베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당당히 전파했을 때, 유대 총독 베스도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パウロがこのように弁明していると、フェストが大声で、「気が狂っているぞ。パウロ。博学があなたの気を狂わせている。」と言った。
당시 유대 총독은 로마의 고위 관료입니다. 그런 유대 총독이 예수님을 전파하는 바울을 보고,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할 정도로, 다시 말해서 로마 고위 관료도 인정할 정도로 많은 학문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두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40년간 왕궁에서 자라면서 모세 장군으로서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많이 벌였고 공도 많이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와 같은 눈부신 성과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오직 사도행전 7장 22절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モーセはエジプト人のあらゆる学問を教え込まれ、ことばにもわざにも力がありました。

라고 기록될 뿐입니다.

그리고 40세 때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는 도망 나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사는 동안에 대해서도 출애굽기 2장 15절에서 22절까지 달랑 여덟 절에 걸쳐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내용은 부인과 결혼해서 아들 낳고 살았다……이게 전부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길리기아의 다소 출생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바리새파 사람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그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공부했고 어떻게 엘리트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어느 시점부터는 성경에서 마치 일거수일투족까지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모세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입니까. 예,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동안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을 떠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성경은 모세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어떨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앞날이 창창했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고백을 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むな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のとりこにもならぬよう、注意しなさい。そのようなものは、人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であり、この世に属する幼稚な教えによるものであって、キリスト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을 통 털어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 그리고 초등학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등학문과 사람의 전통을 따르지 말라고 하지요. 그 대신 누구를 따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말을 만약에 공부를 안 해본 사람이 했다면, 에이, 공부도 안 해본 게 뭘 안다고 그러느냐. 뭐 그럴 거 아니에요? 하지만 바울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많은 학문을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전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는 문화적인 전통이요, 두 번째는 신앙적인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적인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반신앙적인, 즉 신앙에 위배되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을 보면 정초에 신사참배를 합니다. 그리고 또 정초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신사에 가면 습관적으로 동전을 던져 넣고 딸랑딸랑 종을 흔든 다음에 참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을 무슨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전통문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무섭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무슨 종교의식이라고 여긴다면 그 생각을 바꾸기는 오히려 쉽겠습니다만, 아니다, 종교가 아니라 그냥 오랜 역사 속에서 자라온 우리의 문화다……이렇게 여기면서 습관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정말로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골치 아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적인 전통문화입니다. 예컨대 본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가지입니다만, 여기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이것저것 다 갖다 붙인 결과 율법의 종류가 2134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점점 종교 지도자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악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律法の専門家たちも忌まわしいものだ。あなたがたは、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 に指一本もさわろうとはしない。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6세기에 마틴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킬 때의 당시에는요, 정말 교회에서는 지금 보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당시 유럽 교회에서 사용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 교인들은 라틴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종교인들은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했고, 찬양도 라틴어로만 해왔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뭐예요? 그냥 명 하니 앉아 있다가, 성찬식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예배가 됩니까. 그래서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키면서 처음 한 일이 뭐냐 하면, 카톨릭이 이래서는 안 된다면서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입니다. 그리고는 이 마틴 루터는 독일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독일 사람들이 모두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예, 프로테스턴트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항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저항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만들어낸 낡아빠진 전통에 대한 저항, 사람들이 만들어낸 권위주위에 대한 저항,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불의와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특히 한국 기독교를 보면, 저항정신이요? 저항정신은 무슨요, 오히려 과거 가톨릭이 보여주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요, 권력지향적이요, 불의와 부당함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권위주의에 대한 것을 잠시 보도록 합니다. 어느 목사님들 보면 예배 때 가운을 입으세요. 저도 성찬식 때에는 가운을 입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찬식을 치를 때에 경건함을 더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무슨 성경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뭐, 그래요. 설교하실 때 가운을 입으시는 것? 저는 성가대 활동을 7~8년 정도 했습니다만, 성가대도 가운을 입죠? 그게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왔든, 적어도 예배 시간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뜻으로 가운을 입는 것,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이 앞에서 설교하실 때 가운을 입으시는 것,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도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소매에 줄 세 개 있는 가운을 입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예, 이른바 학위가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줄 세 개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학위가운을 입고 설교하시는 목사님들 보면 다들 그 줄 세 개짜리 학위가운, 그러니까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계십니다.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대학에서 얼마나 훌륭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지는 모릅니다만, 그게 과연 주님 앞에서 올바른 것인지 심히 의문이 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예배 시간에는 누구를 찬양하고 누구를 경배해야 하겠습니까. 예, 찬양 받으실 분, 경배 받으실 분,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박사학위 받았어. 이것 봐. 멋있지? 대단하지? 라고 한다면 이건 예배 때 누구를 자랑하고 누구를 내세우고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말을 하면 제가 뭐, 대학원도 못 나왔고, 목사 안수도 작은 교단에서 받았기 때문에 무슨 배가 아파서, 샘이 나서, 부러워서 그런다고 할지 모릅니다만, 여러분, 냉정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よって、世界は私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私も世界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です。


생각해보세요.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예를 들어서 내가 무슨 어디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아예 가운에 그 학교 마크를 새겨서 한다거나, 아니면 그 학교 마크가 달린 졸업식 가운을 사서 입고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목사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성도님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 직분이 뭐냐, 장로냐, 권사냐, 집사냐……너 이 교회 언제부터 다녔냐……심한 경우에는 교인 번호가 몇 번이냐……또 뭐,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방언을 받았느냐…… 이런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 뭐라고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지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 정말로 과장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김동호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한 번 맞아도 크게 맞아야 할 만 큼 타락했다. 만에 하나 이 땅에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하나님께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라고 말할 용기도 없고 말할 양심도 없다”

정말 이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이제 아까 화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떠나지 못하고 있나요? 예, 우리의 고향과 우리의 친척과 우리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떠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출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과거의 전통, 사람이 만들어낸 전통, 신앙을 방해하는 모든 전통이나 관습이나 관행에서 떠나야만 합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안락함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떠나야 해요? 예, 미련 없이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버려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v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しかし、私にとって得であったこのようなものをみな、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損と思うようになりました。それどころか、私の主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を知っていること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いっさいのこと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ためにすべてのものを捨てて、それらをちりあくたと思っています。それは、私には、キリストを得、また、キリストの中にある者と認められ、 律法による
v自分の義ではなくて、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ことができる、という望みがあるからです。

내가 이제 예수님을 믿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배설물처럼 미련을 갖지 않고 모두 버려버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이나 경험이나 전통이나 관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すなわち十字架につけられた方のほかは、何も知らないことに決心したからです。

내가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지만,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지식이나 전통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당장 어떻게 해야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였나요? 농담 삼아 이런 말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어떤 애한테,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아, 저건 저렇게 한 번 해봐……이렇게 조언을 하면, 상대방이 이렇게 말합니다.

“냅둬. 이렇게 살다 죽을래.”

요즘은 별로 안 쓰는 것 같습니다만 어떠세요?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이건 물론 농담으로 하는 유행어이지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지금 믿음에 만족하시나요? 주일 되면 대충 예배 드리고, 헌금도 대충 하고, 뭐 그 정도면 된 거 아냐?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る。あなたの若さは、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는데, 언제까지 병아리 믿음을 가지고 병아리 신앙생활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그렇게 시시하게 시작해서 시시하게 끝날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시시하게 살다가 시시하게 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얽매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날아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도전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지금까지 해본 것.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하는 것은 결코 도전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안 해본 것을 과감하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또 누구는 이런 말을 할지 모릅니다. 거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대……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수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헤엄쳐서 오끼나와까지 가보겠대요. 예, 그럼 죽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주님을 위한 도전을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은 이것이겠지요.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전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 누구한테 같이 교회 가보자고 해보거나, 아니면 해본 적이 있어도 거절 당했어. 그렇다면 뭐예요? 예,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 번 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く。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あけるなら、わたしは、彼のところにはい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고 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문을 두드릴 때 어떻게 두드리세요? 노크하실 때 딱 한 번 딱 두드리고 마시나요? 아니겠죠. 보통 서너 번은 두드립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신다는데 우리도 서너 번은 해봅시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분들한테 하면 그건 좀 예의가 아니죠. 아직 안 믿고 있는 분들한테 한 번 권해보세요.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데 너무나 좋다. 우리 같이 가보자. 그러면 누가 그 마음을 알아주세요? 예. 바로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우리가 도전해 볼 것이 전도밖에 없나요? 아니요. 봉사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찾아보면요 이것저것 할 것도 많고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안 해보셨나요?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를 한 적이 없으세요? 그렇다면 매일 하루 10분, 아니, 5분이라도 좋습니다. 바로 시작해보세요. 그것도 얼마나 믿음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도전인지 모릅니다.

집에서 성경을 읽어보지 않으셨어요? 하루에 한 장씩이라도 시작해보십시오. 그리고 읽는 것은 많이 해봤다고 하시는 고수분들은요, 필사를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정말이지 성경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에게……별 것 아니네……혹시 그렇게 생각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도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극적으로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요? 예, 날아오릅시다.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주신다고 하는데 언제까지 시시하게 병아리처럼 지내시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지금까지 허무하게 살아왔나요? 그냥 그럭저럭인 인생,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듯한 삶을 살아오셨나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봅시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바로 그 때부터 우리 인생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에서 떠나고, 모든 것을 버려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독수리처럼 드높이 날아올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78회 예수님을 영접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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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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