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66회 먼저 된 자

홍성필 2021. 6. 27.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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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먼저 된 자
2017년 2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13장 29절~30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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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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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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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먼저 된 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는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비유가 몇 번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9장과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장면은 똑 같은 상황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19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30절 말씀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28절~31절 말씀,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것은 같은 장면이지요.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은 나중에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기까지는 서로간에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만, 마지막 구절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누가복음에는 이 장면의 묘사에서 18장에 기록되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나중 된 자와 먼저 될 자가 나오지 않고, 오늘 살펴본 13장에 29절~30절 말씀에 등장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장면을 연상하게 되나요? 저는 그랬습니다. 막판 역전! 야구라면, 9회말 투아웃에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 쇼트 트랙 강국인 우리나라라면 예전에 심석희 선수가 보여주었던 마지막 순간에 역전승! 저는 이런 감동적인 역전승이야말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좀 더 잘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저 사람을 좀 이기는 극적인 역전, 내가 그 사람을 역전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할 것이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 사람 곁을 지나서 결승점을 통과하는, 그런 꿈을 꿔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거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면 잘 된다고 하는데, 잘되기는커녕 일은 안 풀리고, 문제는 더 생기는 것만 같고, 이게 지금 올바로 가고 있는 건지 어떤지 불안감이 생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말을 해요? 예수님께서 그냥 한 번 해본 말씀이에요? 아니면 우리를 속이신 건가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는 것은 물론이지만 지금 현세에서도 백 배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신문 기사를 읽고 이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문제를 내 드릴 테니 끝까지 잘 듣고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기사에 실린 사건은 바로 이번 달 2017년 2월 5일 일본 오카야마 현 가사오카 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날은 이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대회가 열려, 각 연령대에 따라서 마련된 코스를 달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종목 중에서 초등학생 부문은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함께 3킬로를 달리는 코스도 있었는데, 이 때 참가한 초등학생이 263명이었습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함께 달리는 것이니까 아무래도 6학년한테 유리하겠죠?
자, 지금부터 문제가 나갑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지난 2017년 2월 5일, 초등학생 3학년~6학년 부문 3킬로 마라톤 대회. 참가한 초등학생은 263명이었습니다. 결과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승한 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이 아니라 3학년 남학생이었습니다. 이 사실도 놀랍습니다만,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학생은 263명 중에서 263번째로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말하자면 제일 마지막에 골인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이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학생들이 양보를 해요? 아니요. 다른 학생들도 우승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이 꼴찌 학생이 우승을 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습니까. 생각하셨나요? 263명 중에서 263번째, 제일 꼴찌로 결승점을 통과한 그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간단합니다. 그 아이 앞에 골인한 262명이 모두 실격처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육상 경기를 보면 경기가 끝나고 순위가 발표되었어도, 나중에 어떤 이유로 한 선수가 실격되는 바람에 순위가 바뀌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순위가 하나 오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두 명도 아닌 263명 중에서 262명이 실격되고 마지막에 골인한 학생이 우승을 하는 일이 발생했나 하면, 사건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3킬로 코스는 초등학생뿐만이 아니라 중학생들도 같은 코스를 달립니다. 아무래도 초등학생들 보다는 중학생이 빠르기 때문에 서로 뒤엉키고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중학생이 5분 먼저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5분 뒤에 초등학생이 출발해서, 중학생들 뒤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었는데, 초등학생은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263명이었습니다만, 그날 따라 중학생 수가 40명밖에 안 되었답니다. 그리고 더구나 그 40명 학생들의 속도가 무척 빨랐대요. 그렇게 되다 보니까 초등학생들 선두그룹이 크게 뒤쳐지게 되어서 중학생들이 안보일 정도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두 아이들이 코스를 잘못 들어간 거예요. 본래 코스는 그 코스가 아닌데 앞을 달리는 아이들이 다른 코스로 가니까, 당연히 뒤따르는 아이들은 우루루 하고 모두 그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는 3킬로 코스인데 그 길로 가면 1.8킬로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이 아이들이 일찍 골인했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빨리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 담당자가 조사를 해보니까, 아이들이 다 잘못된 코스를 달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코스를 잘못 선택해서 결국 3킬로 중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1.8킬로를 달렸기 때문에 이를 공식 기록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달릴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260명 이상이나 되는 학생들이 기껏 달렸는데 전체 학생들을 실격처리 하기도 그렇고, 해서 결국 기록은 <공식기록>이 아닌 <참고기록>으로 하고 1등부터 6등까지 상을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밝혀진 사실이 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 하나가 올바른 코스를 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최측에서 재조사를 해보니까 정말로 이 아이가 3킬로 정규코스를 완주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회가 치러진 날은 2월 5일이었지만, 그로부터 9일 뒤인 2월 14일에, 주최측에서는 이 아이를 초등부 공식 우승자로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이 학생이 정규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앞을 달려가는 아이들이 잘못된 코스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만 옳은 길을 선택했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좀 씁쓸하지 않겠어요? 비록 마라톤이긴 하지만, “얘들아, 저 간판 봐. 그쪽 길이 아니야. 이쪽이야”라고 말을 했어야죠. 그런데 얌체같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자기만 옳은 길로 갔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올바른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 아이가 올바른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아이의 달리는 속도가 너무나도 느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아이가 다른 262명 학생들과 어느 정도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어서, 거기에 자기도 묻어갈 수 있는 정도만 되었더라도 역시 이 아이는 그 다른 학생들처럼 잘못된 코스를 달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너무나도 느렸습니다. 어느 정도로 느렸냐 하면, 자기보다 바로 앞을 달리는 학생, 이 아이는 263명 중 꼴찌인 263등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만, 262등으로 달리고 있는 학생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쳐졌던 것이지요.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 아이는 잘못된 코스로 가는 다른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올바른 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아이가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정규코스를 달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담당직원 덕분이었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참가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탄 담당직원이 선수들 중 제일 마지막에 달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연히 담당자는 본래 코스를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다른 길로 들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야, 그쪽 길 아니야. 이쪽이야. 라고 말해주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앞을 달리는 아이들을 보고 달린 게 아니라 계속 이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담당자의 지시대로 달렸던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마도 끝까지 자기보다 바로 앞을 달리는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아이가 다리가 느려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바로 앞을 달리는 선수들도 잘못된 코스로 갔기 때문에 볼래야 볼 수 없었겠지요.
너무나도 일찍 도착한 262명의 학생들. 속도도 빠른데다 잘못된 코스인 1.8킬로밖에 안 달렸으니 얼마나 일찍 도착했겠어요.
이에 반해, 그렇잖아도 달리기가 느린데, 거기다가 정규코스인 3킬로를 달려서 골인한 남학생. 이 초등학교 3학년짜리 남학생이 정상적인 코스를 달렸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고 하니까, 그 날 이 아이가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에는 아무도 이 아이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위기도 썰렁했겠지요. 주목하기는커녕 어쩌면 관객 중에는 측은한 눈초리로 이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구 쯧쯧쯧, 아니, 아무리 느려도 그렇지 다른 애들이 들어온 게 언젠데 쟤는 이제 들어와?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다른 아이들, 26명이요? 아니요. 자그마치 262명이 실격처리가 되고 마지막 제일 꼴찌로 들어온, 그것도 이 종목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종목이니까, 나이도 제일 어린 이 남학생이 우승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썰렁한 결승점을 쓸쓸하게 통과한 이 아이가 그 종목에서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는 우연히 얻어진 행운이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262명의 학생들이 실격한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골인할 때까지 주최측 담당자가 자전거로 함께 달려준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행운만으로 이 아이는 우승할 수 없었겠지요.
진정으로 이 아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다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6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달렸는데,
아이고, 나는 꼴찌고, 선두그룹은 고사하고 내 바로 앞을 달리는 아이도 안 보여.
길가에서 응원하는 사람들도 없어.
어쩌면 이제 다 집에 가버렸는지도 몰라.
지금 가봐야 창피할 뿐이야.
에이, 나도 그냥 집에 가버릴까.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만약에 거기서 포기했었더라면 나중에 얻게 될 우승도 영광도 사라졌겠지요. 하지만 이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승점까지 용기를 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아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전거로 따라와주는 담당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나머지 262명의 학생들이 길을 잘못 선택한 이유는 안내표지판이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아이도 잘못된 코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때 그 담당직원이, 아니야, 그 길이 아니야, 이 쪽이야. 라고 했을 때,
“아이 참, 그렇잖아도 지금 늦어서 속상한데 왜 이래라 저래라 시끄럽게 잔소리야,”
만약에 그러면서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그 아이는 우승은커녕 잘못된 코스를 달린데다 꼴찌까지 하게 되었으니, 더욱 비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담당자의 지시대로 올바른 코스를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아이가 우승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 아이가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갔다면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갔던 길은 다른 아이들이 갔던, 올바른 길처럼 보이는 그 넓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저것이 올바른 길이다, 라고 판단하는 자신을 의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올바른 길을 아는 이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 33절~35절,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이 안 풀리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마음은 불안하고, 돈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기도해도 감동도 없고, 응답도 없고, 성경을 봐도 다 그게 그 말 같고, 교회에 가서 설교 말씀을 들어도 맨날 했던 얘기 또 하는 것 같고……이렇게 되면 찾아오는 것은 절망이요, 좌절이요, 고통이요, 고난이요, 역경처럼 느껴지는 시기, 이런 시기를 두고 비유하기를 우리 인생의 기나긴 어둡고 캄캄한 터널이라고 합니다.
그게 맞습니까? 사실 이 터널에 비유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믿음에 있어서 터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터널의 안 좋은 부분만 생각합니다. 어두운 터널, 좌우가 꽉 막힌 터널,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터널, 절망의 상징이요 역경의 상징으로 우리는 종종 터널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터널이 어디 나쁜 것뿐입니까?
우리 한 번 터널의 좋은 점을 생각해봅시다. 없어요? 아니요. 왜 없겠습니까.
먼저, 터널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어쩌면 복잡한 터널이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터널은 길이 하나뿐입니다.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어요.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로, 터널은 오직 앞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시간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다가 결국은 돈 잃고 시간 잃고 건강 잃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터널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저기 앞에 먼저 가고 계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터널은 반드시 출구가 있습니다. 출구가 없는 터널은 터널이 아니라 그냥 굴이죠. 우리가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반드시 출구가 있고, 그 출구로 인도해주실 분은 바로 우리 발길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터널은 지름길입니다. 사람들이 터널을 왜 만들었겠습니까.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좌절이나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서요? 고난과 고통을 주기 위해서 터널을 만듭니까?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답답함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요? 아니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터널을 만듭니다. 터널이 없다면 먼 거리를 멀리 돌아서 가야만 합니다. 이게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서울에서 운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남산터널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일본의 경우,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된 군마현과 니이가타현을 잇는 시미즈 터널은 길이가 고작 10킬로도 채 안 된다고 합니다만, 이 터널이 개통됨으로 인해서 단축된 시간은 무려 4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터널이 안 좋은 건가요? 아닙니다. 터널은 우리 생활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믿음의 터널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셉도 총리가 된 것이 그의 나이 서른 때이고, 다윗이 왕으로 즉위한 것이 또한 서른 살 때입니다. 이 얼마나 빠른 출세입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배경에는 그들이 거쳤던 터널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시기는 열 일곱 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는 나이가 30살이니 그의 터널은 몇 년이에요? 단순계산으로 13년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난 다음에 사울 왕한테 쫓겨서 광야생활을 하다가 사울이 죽고 난 다음에, 그의 나이 서른에 유다 왕, 헤브론의 왕이 됨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도피생활이 끝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그의 나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던 다윗이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그저 형들한테 줄 도시락 심부름을 하러 왔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적어도 20세는 안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의 도피생활도, 아무리 적게 잡는다고 해도 10년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광야에서 양을 치는 아버지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 중 열한 번째였습니다. 출세요? 재산이요? 장자면 또 모를까, 서너 번째도 아닌 열한 번째한테 무슨 기회가 돌아오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13년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나이 서른에 당시로서는 최대 선진국인 애굽의 총리라는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을 치는 아버지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아무런 대우도 대접도 못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10여 년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유다와 나아가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여 년이 짧아요? 아니요, 길죠. 남들보다 1년 뒤쳐져도 아쉽고 안타깝고 분통이 터지는데 10년이 뒤쳐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보통 일입니까. 하지만 그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다 어떻게 해서 얻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터널을 통과하면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앞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갔습니다.
그들은 출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영화 벤허에 보면, 억울하게 노예로 끌려간 주인공 벤허가 군함 밑에서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로 힘들게 노를 졌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그 배 지휘관이 벤허에게 묻습니다. 이 배에서 군함에서 노를 저은 지 얼마나 됐느냐. 그러자 한 달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는 다른 군함에서 3년 동안 노를 저었다고 대답합니다. 지휘관은 그에게 절망적인 말을 하지요. 우리가 승리하는 한 너는 계속 배에서 노예로 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패배한다 하더라도 너는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벤허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쇠사슬에 묶여 죽으라고 3년 동안이나 살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용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믿음의 터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더할 나위 없는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축복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눈에는 나를 앞질러가는 사람밖에 안 보이나요? 아니, 내 앞을 달려가 가는 사람도 아예 안 보이나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해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밀어주십시다.
주님이 나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무슨 근심 걱정이 있겠습니까.
벤허의 말처럼 우리더러 여기서 이렇게 쇠사슬에 묶여 죽으라고 지금까지 살려두셨겠습니까.
우리더러 여기서 이렇게 절망과 좌절 속에 주저앉으라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가 받을 징계는 예수님이 이미 모두 십자가 위에서 다 받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으로 가는 통로이자 지름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절망 속을 헤맬 때도 있을 것입니다. 불안과 외로움 속에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오늘 말씀 드린 이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이를 떠올려봅시다. 그는 빨리 달리지 못했습니다. 추월을 당하면 당했지 한 사람도 추월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우승을 차지하고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좌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인도해주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올 지라도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서, 마침내 믿음 안에서 <먼저 된 자>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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