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깨어 있는다는 것” 目を覚ましてい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깨어 있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잠을 자면 안
되는 건가요?
예전에 어떤 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잠이 많으면 안 된대요. 새벽기도도 드리고 철야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언제 잠을 잘 새가
있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잠을 자게 하는 것은 마귀 짓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127편 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あなたがたが早く起き 遅く休み 労苦の糧を食べたとしても それはむなしい。 実に 主は愛する者に眠りを与えてくださる。
참 은혜로운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한테 잠을 주신다고 합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학교나 직장에
지각을 하거나, 잠 때문에 약속을 어기고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잠을 안 잔다는 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합니다. 충분히 잠도 자고 먹는 것도 잘 먹어야 주님의 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시편 127편 2절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는 말씀은 마가복음 6장 42절만큼 제가 참 은혜를
많이 받는 말씀입니다.
참고로 마가복음 6장 4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6장 42절
“다 배불리 먹고”
彼らはみな、食べて満腹した。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오늘은 이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봄으로써,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 속에 담긴
진정한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알던 분이신데, 이 분은 예전에 월간지를 발행하는 출판사에 근무한 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이 월간지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일반 출판물과 달리 월간지라고 하는 것은 매달 정해진 날에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매달 마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 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마감이 다가오면 정말 그 때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말 코피를 쏟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마감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일이 꼭 이 분이 근무했던 월간지 출판사만
그렇겠어요?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월간지 출판사가 대부분 매달 이와 같이 치열하게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까 정말 참 존경스러워집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만이 아니지요. 그러면 이른바 정기 간행물이라고 하는 것이 월간지만 있겠어요? 아니요. 주간지도 있지요.
월간지의 경우에는 한 달에 한 번 마감이 있지만 주간지는 매주 마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4번 정도 마감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아……정말 힘들겠다 싶더라구요.
그러면, 더 힘든 건 없을까요? 아니에요. 있지요. 매주 나오는 게 주간지라면, 매일 나오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매달 나오는 게
월간지, 매주 나오는 게 주간지, 그러면 매일 나오는 게, 일간지. 그렇습니다. 바로 신문이 그렇겠지요.
이건 뭐,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마감입니다. 제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매달 나오는 월간지도 그렇게 힘든데 매일매일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고 그러려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처럼 이 <마감>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 피를 말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일간지 신문 같은 것을 보면 종종 매일 연재되는 소설 같은 것이 있는데, 이와 같은 연재소설은 실력이 있다고 아무나 맡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일단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써야 하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 짧은 분량 안에서 어떤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일반 소설이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이나 풍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상세한 묘사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신문 연재 같은 경우에 이런 묘사만 2~3일 연속해서 이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작가는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힘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문연재를 하기 위해서 작가한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아이디어나 문장력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체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겠죠.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체력이 없으면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그 정도의 원고를 써 내려갈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참
세상에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어디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어느 작가가 쓴 짧은 수필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작가인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마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말을 듣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면서 성가대를 섬기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성가대 자체의 주보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주보를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중간에 공백이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그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데, 확인을 해보니까 대략 270회 정도 주보를 만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주보 안에 제가 좀
글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 글들은 지금도 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올려져 있는데, 총 121개 정도가 됩니다. 항상 제가 글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이 글을 쓸 때 느꼈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대부분 쓰고 난 다음에는 좀 아쉬운 마음이 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시간이 넉넉했었다면 조금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는 아쉬움이었습니다. 글 길이는 A4용지 한 장
정도 되는 분량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좀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정리도 해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해서 정말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 때 저는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만, 그렇다 보니까 주중에는, 수업이 끝났다 하더라도, 교제도 만들고
수업 준비도 하고 그래야 하니까 시간이 많지가 않지요.
그래서 항상 그 전날까지 허겁지겁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2007년부터 2015년 사이에 주보를 만들지 않았던 기간이 2년 정도가 있었습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만들지 않았어요. 자,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시간이 많이 있지요. 매주 주보 글을 써야 한다는 마감이 있는
것이 아니니 얼마든지 여유롭게 마음껏 시간을 써가면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의 문제 나가겠습니다.
단순계산으로 2007년부터 2015년. 대략 7년 중에서 2년 정도를 뺀 5~6년 동안에, 주보를 제작하면서 거기에 121개 정도의
글을 썼다면, 주보를 만들지 않았던 2년 동안에 저는 주보에 실을만한 글, 믿음에 대한 글을 몇 개나 쓸 수 있었을까요.
대략 5년 동안에 121개라고 한다면 단순계산으로 1년에 24개 정도가 되지요. 그렇다면 2년에 48개까지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10개나 20개 정도는 글을 쓸 수 있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정답은 몇 개였냐 하면 예, 0였습니다. 그 동안 글을 하나도 안 썼던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마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이 2015년 10월이니까 이제 5년째가 되겠지요. 이제 집에 가서 다시 동영상으로 촬영을 하고 인터넷에
올립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잠시 확인을 해보았더니, 동영상으로 설교 말씀을 촬영을 하고 올린 것이 지난 주까지를 본다면 한국어 버전이
212회였고, 일본어가 121회였습니다.
이 둘을 합하면 333회분이 되고, 각 회당 30분 정도라고 잡으면 전체 길이는 대략 166.5시간. 쉬지 않고 시청을 한다고 하면
대략 7일 정도 걸리는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의 두 번째 문제 나갑니다.
수 십 년 간 목회를 하신 분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한 기간이라 대단히 민망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만, 비록 주님의
말씀을 전한지 몇 년 밖에 안 된 제가 이 정도의 동영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번. 홍 목사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2번. 기타.
이건 겸손이 아니라, 제가 능력이 탁월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이 기록에 의하면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한 번 설교를 했더니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지금 한국어와 일본어를 합해서 300번이 넘도록 말씀을 전하고, 거의 매주 여기저기에
전도를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 교회를 살펴보면 아직 3천 명이 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느냐 하면, 다름 아닌 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에 말씀을 전해야
하는 그 마감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제 밤에도 밤늦게까지 말씀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언제까지라도 좋다. 되는 대로 써라……라고 하면 정말 그야말로 하나도 글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이 2019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 올 한해 어떠셨습니까. 보람 있는 1년이었습니까. 아니면 아쉬운 1년이었습니까. 흔히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1년이 짧게 느껴진다고 하지요. 아, 정말 1년이 365일이 아니라 500일 정도가 1년이었다면 조금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더 알찬 1년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그런 생각 드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1년이 500일이 아니라 1000일이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결과는 비슷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긴장이 더 풀려서 오히려 더 안 좋은 한 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볼 때,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이 정도로라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1년이라고 하는 마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년이라고 하는 마감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次の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泥棒が夜の何時に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家の主人は目を覚ましているでしょうし、自分の家に穴を開けら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だから、どのように受け、聞いたのか思い起こし、それを守り、悔い改めなさい。目を覚まさないなら、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わたしがいつあなたのところに
来るか、あなたには決して分からな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은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자기 마음대로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깨어 있으면 마지막 때가 언제
이르는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자기는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3장 32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ただし、その日、その時がいつなのかは、だれも知りません。天の御使いたちも子も知りません。父だけが知っておられます。
마지막 때는 천사들도 예수님도 알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자기들은 천사나 하물며 예수님보다도 높다는 소리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언제 도둑이 들어올 것이냐, 언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느냐를 알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 날은 온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정말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야말로 믿음에 있어서 마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건강해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삶에 있어서는 언제가 마감이 다가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는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마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의 모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며칠이면 2019년이 끝납니다. 하지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우울해할 것 없습니다. 이는 바꾸어 말한다면 2019년을
졸업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함께 2019년을 졸업하는 졸업 동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나나요?
아닙니다. 이제 2020년을 함께 입학하는 입학 동기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학을 할 때 어땠습니까. 불안하기도 하지만 설레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마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마감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 언젠가는 주님을 만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게
되는 그 날까지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우리 이웃, 미우나 고우나 똑 같은 2019년 졸업동기,
그리고 2020년 입학 동기인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주님께서 인도해주심을 따라, 예수님이라고 하는 푯대를 향해서, 우리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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