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12회 참으로 큰 기쁨

홍성필 2021. 7. 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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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회 참으로 큰 기쁨
2019년 12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0절~11절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ルカの福音書 2章 10節~11節
“10. 御使いは彼ら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私は、この民全体に与えられる、大きな喜びを告げ知らせます。
11.今日ダビデの町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この方こそ主キリスト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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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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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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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으로 큰 기쁨” 真に大いなる喜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여 성탄절 예배로 드려지는 날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얼마 전에 일본에서 보니까 어떤 퀴즈방송에서 이런 문제가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예부터 생일날 이것을 먹는 전통문화가 있는데, 이게 뭐냐고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게 답이 뭐겠습니까. 외국사람들한테는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요. 그렇습니다. 미역국입니다.

사실 이건 좀 이상하긴 하지요. 미역국은 원래 아이를 낳은 산모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해서, 아이를 출산하고 난 다음에는 산모가 먹곤 하는데, 여기서부터 유래가 되어서 이제 자기 생일이면 먹는 음식이 된 것 같습니다.

일본에는 또 크리스마스가 되면 치킨을 먹는 문화가 있지요?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흥미로운 문화 같습니다.

2천년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난 다음에 미역국을 먹었는지, 치킨을 먹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그 날짜가 지금 달력으로 계산하면 정말로 12월 25일이었는지 아닌지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여전히 다툼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여 년 전쯤, 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4년 경이라고 하는데,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땅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생일이 되면 어떻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축하해줍니다. 그러면 축하를 받는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지요? 감사합니다. 뭐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이는 한국사람도 그렇고 일본사람도 그렇고, 뭐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다 같겠지요.

생일을 축하해주고, 그 축하한다는 말에 감사하다고 화답하는 이유는, 생일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내 의지에 따라서 태어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다 라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생일에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욥기 1장 4절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彼の息子たちは互いに行き来し、それぞれ自分の順番の日に、家で宴会を開き、人を遣わして彼らの三人の姉妹も招き、よく一緒に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た。

마태복음 14장 6절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ところが、ヘロデの誕生祝いがあり、ヘロディアの娘が皆の前で踊りを踊ってヘロデを喜ばせた。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비록 대단히 큰 부자나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문화는 당시 이스라엘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생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당시에도 이처럼 생일을 축하하는 문화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성경에는 어디에도 예수님의 생일잔치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한 생명의 탄생은 희망을 뜻합니다. 이는 자신만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어머니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女は子を産むとき、苦しみます。自分の時が来たからです。しかし、子を産んでしまうと、一人の人が世に生まれた喜 びのために、その激しい痛みをもう覚えていません。

이처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기쁨이고 희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만, 반면에 예수님의 탄생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있으나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잘 될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출생은 다름 아닌 십자가가 약속된 출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입니까. 뛰어난 사람이요? 착한 사람이요? 훌륭한 사람이요? 아닙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의인이나 선인은 고사하고 씻을 수 없는 무거운 죄인, 그것도 자기가 그렇게 심각한 죄인인줄도 모르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를 위해서,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는, 그 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죽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 형은 지극히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만 내려지는 끔찍한 판결이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럴 만한 죄가 있으셨나요?

이사야 53장 4절~5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끔찍한 일을 당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 잠시 좀 기본적인 질문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이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탄생하실 때는 언제였을까요? 혹시 그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성경을 배우기 전까지, 저는 저 나름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창세기 때 창조하셨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황당하신가요? 하지만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하기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この方にはいのちがあった。このいのちは人の光であった。

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맨 처음으로 만드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이렇게 기록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하,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만드실 때 예수님부터 창조하셨구나……하는 생각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셨는데,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통해서 예언을 하시고 이름까지도 주셨습니다.

물론 이 점만 보면 대단히 놀랍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에서만 보자면 이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날 때에도 그랬고, 뿐만 아니라 창세기 16장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의 여종인 하갈이 아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이름까지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영화로도 유명한 사람이죠? 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도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출생을 예언했었고, 신약에 와서는 누가복음 1장 13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에도 이를 천사가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을 친히 하나님의 사자가 지어주곤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이른바 수태고지라고 해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그 출생을 예언하고 <예수>라고 하는 이름까지도 말해주곤 했습니다만, 이처럼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일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 이 예수라고 하는 분이 이삭이나 삼손이나 세례 요한 같이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삼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요. 교회 역사를 배워보니까 이것만이 아니라 더 많은 주장들까지도 이미 다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훨씬 옛날에 다 해결된 문제였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고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일단 예수님과 빛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요, 물론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은 하지만, 그렇다고 창세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요한복음 1장 1절~3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3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태초에”(初めに)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이 창조 되기 전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만이 아니라, 시간을 비롯해서 세상의 법칙 모든 것이 창조되기 뜻하는 것입니다만, 그 때부터 이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라는 기록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가졌던 두 번째 생각. 태어나시기는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켜보니까 참 믿음도 좋고 성실하고 해서, 그래, 너라면 내 아들을 삼아도 좋겠다 하고 나중에 아들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쩌다가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부터 끊임없이 계속해서 예언되어 왔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성경에 보면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만 하고 아직 정식 결혼을 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적으로 보면 요셉의 후손이 아닌, 다시 말해서 요셉의 피가 섞이지 않고 태어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어디까지 나오냐 하면 구약 마지막인 말라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도 또한 살아계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이신 여호와 하나님, 성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어떤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아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합해져서 완벽한 하나님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지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모두 불완전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33.33%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가요?

이 말을 할 때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과즙 30%짜리 주스 3개를 넣어서 섞으면 과즙 90%짜리 주스가 되나요? 그러면 과즙 30%짜리 주스 4개를 더하면 120%짜리 주스가 되나요? 아닙니다. 여전히 30%짜리 주스입니다. 30%짜리 주스는 10개를 더해도 100개를 더해도 여전히 30%짜리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완벽한 하나님이시요, 예수님도 완벽한 하나님이시요, 성령님도 완벽한 하나님이라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도 완벽한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나 성령님도 그렇다면, 그러면 뭐 여호와 하나님만 공부하면 되겠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이런 생각을 안 해보셨다 하더라도, 장차 이런 생각을 하실까 봐 미리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죄값을 치러야지만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멀쩡한 척을 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의 판결은 뻔합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지옥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죄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죄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요.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냐 하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이사야 53장 5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구원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천국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이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성령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성경을 알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11절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御使いは彼ら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私は、この民全体に与えられる、大きな喜びを告げ知らせます。
今日ダビデの町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この方こそ主キリスト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예수님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 우리에게 미칠 참으로 큰 기쁨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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