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10회 신앙의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홍성필 2021. 7. 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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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회 신앙의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2019년 12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マタイの福音書 5章 46節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何の報いがあるでしょうか。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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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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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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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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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의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信仰の絶対評価と相対評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평가를 하거나 평가를 받는 경우는 여러 상황을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평가 방법은 크게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구분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절대평가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어떤 성적을 메기는 구분이 A, B, C, D라고 되어 있는 경우에, 100명의 학생이 모두 90점 이상을 받았다면, 만약에 90점 이상이 A라고 했을 때, 100명의 학생 모두가 A학점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100명의 학생이 모두 40점 대를 받았어요. 50점 이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100명 모두가 D학점을 받을 수 있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절대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상대평가는 어떤 것이냐 하면, 점수가 어떻게 나왔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해진 비율에 따라서 A부터 D까지 성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서 살펴본 예처럼 어떤 시험에서 100명의 학생이 모두 90점 대를 받았거나, 반대로 모두 똑같이 40점 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반드시 A부터 D까지의 성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하물며 점수가 똑같았다 하더라도 다른 요소들, 예컨대 학교에서라면 무슨 과제나 출석률, 수업 태도까지 고려를 해서라도 무조건 이 비율에 맞게 성적을 메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예를 들어서 어떤 시험 같은 경우에도, 무조건 몇 점이 넘으면 합격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면 이는 절대평가이고, 반면에 점수가 어떻게 나오든 몇 명만 합격시킨다고 하는 경우는 상대평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좋은 평가를 하시면 축복을 많이 주시고, 나쁜 평가를 하시면 축복을 좀 적게 주시거나, 심할 경우에는 저주나 벌까지도 내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이나 성적에서 좋은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그냥 막무가내 식으로 열심히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평가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야지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고, 그 중요한 것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지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평가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력을 아무리 해도 힘만 들고 축복을 못 받게 되는 최악의 경우도 일어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평가로 판단하실까요. 아니면 상대평가로 판단하실까요.

이를 위해서 먼저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 42절까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42절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먼저 38절 말씀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1장 24절~2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24절~25절
“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手には手を、足には足を、
火傷には火傷を、傷には傷を、打ち傷には打ち傷をもって償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부분은 세상적으로 보면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내용으로도 유명합니다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등장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처럼 유명한 말씀이다 보니 세상 사람들도 종종 이 구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렇게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경우를 보면, 예를 들어서 “내가 이만큼 당했으니까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뭐 이럴 때 이런 대사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반드시 복수를 하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좀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먼저 잠언 24장 2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24장 29절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彼が私にしたように、私も彼にしよう。彼の行いに応じて、仕返しをしよう」と言ってはならない。

다음으로 로마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물론 출애굽기에 나온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잠언은 솔로몬 왕이, 그리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쓴 것이지요.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66권, 구약 39권 신약 27권은 모두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으며, 서로 간에 모순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 21장 24절~25절에 나온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 라는 구절이 복수를 하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한다면, 앞뒤가 맞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이는 복수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반대로 복수를 제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피해와 똑 같은 분량의 보상이나 배상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이를 피해자인 내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여러분처럼 양심이 있으신 분들은 괜찮겠습니다만, 세상에 보면 내가 입은 피해를 조금 크게 부풀려서 상대방으로부터 받아내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출애굽기에 나온 규정은,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조금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받아내려고 하지 말고, 피해를 입은 만큼만 청구하라는 내용입니다.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피해를 입힌 쪽에서는 조금만 물어주고 싶어할 것이요, 피해를 당한 쪽에서는 조금이라도 많이 받아내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만큼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재판을 통해서, 객관적인 사람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에 의존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수를 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복수를 제한하신 것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8절~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예수님께서는 복수를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셨다는데,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대부분 보면 사람들은 오른손잡이가 많은데, 오른손 잡이인 사람이 상대방을 있는 힘껏 뺨을 때린다고 하면 맞는 사람은 왼쪽 뺨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이는 오른손 잡이인 사람이 손등으로 자신의 오른편 뺨을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해석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모두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뺨 맞아보셨습니까. 이렇게 때리는 뺨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통증만으로 본다면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주먹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때린다면 모를까, 그깟 손등으로 얼굴을 때린다고 해 봤자 뼈가 부러지거나 이빨이 나가거나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그런 맞은 뺨을 맞은 사람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대단히 기분이 상하는 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5장 40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를 또 잘못 이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 여기서 오늘 질문이 나갑니다. 잘 들어보시고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왔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봐, 당신 목사지? 그러면 성경 말씀을 잘 지켜야 하잖아?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고 하는데, 당신 살고 있는 집 있지? 그거 나한테 줘.

만약에 누가 저한테 이런 요구를 했다고 하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번, 그래.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비록 내 집은 아니라 월세이긴 하지만, 내가 내일 당장 이사를 갈 테니 당신이 들어와서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2번,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라. 라고 말한다.

3번, 기타

어떤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이건 목사 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잘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39절~40절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0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40절 말씀은 어떻습니까.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무슨 젊은 여자 속옷 도둑도 있다고 하는데, 당연하지만 이건 그런 말씀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것, 뭐, 제가 무슨 뭐 BTS 같은 아이돌도 아닌데, 제가 입은 러닝 같은 속옷이 것이 값어치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런 값어치가 거의 없는 네 속옷 하나를 빼앗기 위해서 누군가가 너를를 고발까지 했다면 어떻게 하냐. 예수님은 많은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새 옷을 사서 주라는 것도 아니에요. 누가 너한테서 그런 값어치 없는 것들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오죽 가진 것이 없으면 네가 입던 러닝 하나 빼앗기 위해서 고발까지 하겠니. 야, 차라리 네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안 입는 겉옷 하나 있잖니. 러닝 만이 아니라 어차피 네가 안 입는 그 겉옷까지 줘라.

이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태복음 5장 41절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1절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여기서 5리라고 한국말로는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주석서에 보면 대략 성인 남성 1,000발자국 정도, 대체적으로 1미터가 조금 넘으니까 1.2킬로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5킬로나 10킬로 접도가 아니라 1.2킬로를 가게 할 정도의 수고를 요구하면 2.4킬로 정도를 갈 수고까지도 해줘라……이런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42절에 보면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또 이것만 떼 내어서 내가 달라고 하는 것을 당신은 다 줘야 한다……이렇게 우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발 그런 억지를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제게 와서 말하기를, 이 보시오, 홍 목사. 내가 돈이 없는데, 목사인 당신이 나한테 100만엔 만 꿔줘. 성경에서는 꿔달라고 하는 사람한테 거절하지 말라고 적혀 있잖아? 뭐 그러면 또 어떻게 합니까.

이 구절을 두고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트 톨룩(アウグスト・トールック)이 말하기를 “만약에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줘야 한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줘야 할 것인가” 하고 더 극단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 39절부터 이어지는 구절은 모두 한 가지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그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줘버리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 어떠십니까. 별것 아닌 것 같습니까. 아니요.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툼이 일어나고, 하물며 얼마나 많은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존심이 상할 때, 예수님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여러 모로 보나 우리보다 좀 나은 사람한테 무시를 당해도 기분이 나쁜데, 씻지 못할 죄인들한테 하나님의 아들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7절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아 주셨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핍박을 통하여 자존심이 상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를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모든 것을 감당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내 자존심 챙길 것 다 챙기고,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앙 안에서도 절대평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는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는 절대적 평가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의로 여김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상대적 평가도 분명히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何の報いがあるでしょうか。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너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희를 먼저 사랑하는데, 그 사람을 사랑해봤자 무슨 상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리도 이같이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리라고 하는 것은, 요즘의 세무 공무원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죄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면서 동족의 피를 빠는 매국노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와 같은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받을 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끝이 아닙니다. 만약에 구원이 최종목표라면 이와 같은 두꺼운 성경은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기도하고, 예배 출석하고, 십일조 내고, 가끔 금식하고, 뭐 그 정도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천국은 가만히 앉아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침노라고 하는 것은 있는 힘껏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위해서 그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힘껏 달려간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처럼 달려간다고 하는데, 우리가 여유 부리고 쉬엄쉬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상대평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남들과 똑 같은 일을 해 봤자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라고요? 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조금은 내려놓읍시다.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그 자존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줍시다.


돈 많이 쓰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희생을 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별로 안 입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겉옷 값 정도입니다. 1킬로 가는 것을 2킬로 가는 것 정도입니다. 1킬로는 걸음걸이로 15분 정도 걸려요. 자동차로 가면 1분도 안 걸리죠. 그거 2킬로 가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자존심을 나누어 주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버리신 자존심과 비교해본다면, 나한테 있는 자존심이 대단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앙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 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우리가 작은 내 자존심을 이웃한테 나누어 주면, 그 빈 자리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사랑을 기억하시고, 이웃한테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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