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거룩한 땅, 거룩한 길”聖なる地、聖なる道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주일이 끝나면 주일 말씀을 가지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메일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하시는 분들도 물론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다음부터 보내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분께서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짧은 글이니 읽어드리겠습니다.
수신거부. 축복 있기를 축원합니다.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합장
문맥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종교를 믿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만, 이 짧은 글을 읽고 저는 대단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길, 좋습니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길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과연 무엇인지, 어떤 길인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고 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길을 걷고 계십니까. 넓은 길, 탁 트인 길, 환한 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 새소리가 들려오는 길, 시냇물이 흐르는 길……
우리가 가는 길이 항상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두워서 한
치 앞도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길바닥이 얼어서 미끌미끌 거리기도 합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어제는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있는 자전거도로를 달렸습니다만, 갈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올 때는 맞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갈 때는 30분 걸렸는데 올 때는 1시간 이상 걸린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좋은 길, 축복된 길로 가야 할 것도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의문은 더욱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을 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み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訳すと、神は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 말씀은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우리 모두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만을 만나셨으며,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맨 마지막 구절이죠? 28장 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
ま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彼らを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예수님께서도 직접 우리와 언제 함께 계시겠다고요? 예,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라면 이 얼마나 축복되고 거룩한 길이요, 거룩한 삶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좀 거룩한 삶 같으신가요?
하이고, 거룩하긴 뭐가 거룩해요. 그냥 사는 거죠. 뭐,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속상한 일, 답답한 일도 많습니다. 건강은 여기도 안
좋고 저기도 아프고요, 고민거리 걱정거리가 끊이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거룩한 삶이랍니까.
이러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それは、「わたしが聖であるから、あなたがたも、聖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어떻게 보면 참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거룩하시니까 우리더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에이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거룩하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어?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거룩하다……라고 하면 글쎄요. 사람이 거룩하다고 하면,
옛날에 예수님이나 성인들을 그려놓으면 머리 뒤에 이렇게 후광이 동그랗게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시겠습니다만, 우리 나중에 집에 가서
거울 한 번 보세요. 혹시 내 머리 뒤에 둥그런 게 있나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둥그런 게 있을까요? 아니면, 여러분, 저는 어떻습니까. 제 머리 뒤에 희미하게나마 뭔가 좀 보이세요?
예, 만약에 보인다……라고 하시는 분은 내일 예쁜 안경 하나를 맞춰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보이긴 뭐가 보이겠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거룩함은 어떻게 기록되어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柴の木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데, 이에
대해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神は仰せられた。「ここに近づいてはいけない。あなたの足のくつを脱げ。あなたの立っている場所は、聖なる地である。」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래요. 그러면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을 잘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대면한 순간이에요. 자, 어느 정도 상상이 가시나요?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예>, <아니오>로 마음 속으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라고 모세한테 말씀하시기 전에, 모세는 그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둘째, 하나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라고 모세한테 말씀하시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눈부신 빛이 나면서 그곳 땅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했을까요?
어떠십니까.
자, 그렇다면 마지막 세번째 질문입니다. 만약에 첫째 질문도, 둘째 질문도 답이 <아니요>였다면, 그렇다면 그곳 땅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예, 정답은 모두 다 아셨을 것입니다. 이 세 문제 모두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모세는 그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기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신 순간, 눈으로 알아볼 수 있게 거룩한 땅으로 변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땅이
어떻게 생겼겠어요? 부르신 땅이 호렙산이었으니까 그냥 산길이었겠지요. 제가 직접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인터넷으로 보니까 완전히
바위산이더라구요. 그러니 아마도 하나님께서 거기가 거룩한 땅이라고 하시기 전이나 하신 다음이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바위산에 바위
바닥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곳이 거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디가 거룩하다고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네가 선 곳>이 거룩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곳이 어디입니까. 거룩한 땅을 이른바 <성지>라고 합니다. 제가 예전에 성지순례에 대해서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주로 기독교인 분들이 성지순례라고 하면 이스라엘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을 돌아오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전한 것을 찾아보니까 작년 8월달에, 제가 말씀드리기를, 이는 <성지순례>가 아니라 <성지관광>이다, 라고 했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까 이는 좀 적절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럼 성지순례도 아니고 성지관광도 아니라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역지
관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뭐, 굳이 <관광>이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한다면 <탐방>, <답사>, <방문>, <견학>
이라는 말을 쓰셔도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갈릴리 등을 다녀오시는 것은 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사역했던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지요.
오해하지 마세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 곳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저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 한 번 가 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순례>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적절치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순례>라고 한다면 어떤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그 지역이나 장소를 방문하고 참배를 하는
종교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 가는 것이 종교행위가 되나요? 만약에 이를 두고 종교행위라고
한다면, 여기를 안 간 사람보다 갔다 온 사람이 더욱 신앙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지요. 그래서 뭐 여기를 꼭 갔다와야지
목사나 장로나 권사 직분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 준다거나, 그런 게 있어야 되는거 아니겠어요? 글쎄요. 실제로 이런 황당한 규정을
둔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행이 저는 아직 그런 규정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 갔다 오면 믿음이 더해지나요? 신앙심이 깊어져요? 아닙니다. 무슨 여행사나 그런 곳에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성지순례>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역지 방문>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지금도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 예수님께서 계시다고 한다면 성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꼭 그 곳에 가야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무소부재라고 합니다만, 그것이 것이 무엇입니까. 무소부재.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계시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지인가요? 거룩한 곳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예수님을 모셔드린 우리 마음이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되신 이곳 교회가
훨씬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 비아 돌로로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다는 길이 거룩합니까? 아니요. 그보다 여러분께서 주일에
교회로 나오신 그 발걸음이 훨씬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했다고 하는 교회에 들어가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전해지는 장소를 보거나,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돌항아리를 보며 감탄하는 시간 보다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훨씬 더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시는 곳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이야말로 거룩한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이 곳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 곳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그럼 왜 여기 있는 것일까요?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여기 오셨습니까? 그냥 지금까지 살아오다
보니 여기 앉아계신 건가요?
물론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계신 곳이나 상황에 만족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으나,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 분들은 어떻습니까.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아,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내가 옛날에는 얼마나 잘나갔는지 알아? 날 무시하지마.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이러는 분들 꽤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죠?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현실 속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나요? 아니요.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못나고 모자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이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금 이 곳에 옮겨놨어요. 아무도 안 알아 줍니다. 답답합니다. 정말 내가 여기서 썩을 인물이 아닌데
말이에요. 참 그럴 때는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굳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으셨다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태복음 7장 9절~11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でしょう。また、子が魚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왜 이처럼 고단하고 답답하고, 되는 일은 없고 주변 사람들은 맨날 속만 썩이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왜 이런 곳으로, 왜 이런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으셨어요.
그것은 바로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 믿어져요? 그러나 이를 믿으셔야 합니다. 이를 안 믿으면
불평과 불만으로 인생이 파탄 나고 맙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사실을 믿었을 때, 진정으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축복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완전히 믿어버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의 팔자가 얼마나
기구했습니까.
어린 나이에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는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그런데 이 요셉은 어느 순간에도 불평과 불만이 없었습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39장 2절~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主がヨセフとともにおられたので、彼は幸運な人となり、そのエジプト人の主人の家にいた。彼の主人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主が彼のすることすべて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のを見た。
그리고 어이없는 누명을 써서 감옥으로 갇혔을 때는요?
창세기 39장 21절~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しかし、主はヨセフとともにおられ、彼に恵
みを施し、監獄の長の心にかなうようにされた。それで監獄の長は、その監獄にいるすべての囚人をヨセフの手にゆだねた。ヨセフはそこでなされるすべてのことを管理するようになった。監獄の長は、ヨセフの手に任せたことについては何も干渉しなかった。それは主が彼とともにおられ、彼が何をしても、主がそれ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らである。
겉으로만 보면 요셉의 운명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불행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나이 서른에 애굽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의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 요셉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혀야만 했고, 그 전에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야만 했고, 그 전에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즉, 사람의 눈에는 가장 안 좋은 것만 받았던 요셉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는 노예로 팔려갔던 자리, 감옥에 갇혔던 자리야말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던 가장 거룩한 곳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 장군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것도 모자라서 감옥에 갇혔을 때,
바로 그 자리가 너무나도 거룩한 자리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그저 노예로 팔려가 이국땅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은 야곱의 아들 요셉……정도로만 기록되고 말았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지금 상황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속상한 일들이 많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고난이고
고통이고 역경이고 저주이고 불행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거룩한 순간이요, 지금 이 곳이야말로 거룩한
땅이요,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야말로 거룩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잠언 4장 27절을 봅니다.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足を悪から遠ざけよ。
이 외에도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는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이요 세상을 의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 힘들지요, 고달프지요, 지금 당장이라도 정말 눈으로 보이는 우상을 섬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세상을
의지하고 싶어집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힘들고 외롭고 고달프더라도,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허락하신 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길은 절망으로 가는 길도 아니요, 오직 구원으로 가는
길, 축복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저 멀리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요,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가고 있는 길이
거룩한 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큰 이유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믿음의 길, 거룩한 길, 영광된 길, 축복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으로 가는 길, 구원의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조금 힘들더라도, 우리 모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곳이 거룩한 땅이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거룩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마침내 요셉이 받았던 큰 축복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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