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大いなる働きをされる神様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을 보니까 어떤 분께서 이런 글을 써놓으셨습니다.
모두가 양반이 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나라, 모두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나라, 모두가 정규직이 되지
않아도 여유있는 나라, 모두가 자가주택에서 살지 않아도 걱정이 없는 나라를 위해
참 좋은 말 아니에요? 물론 요즘 세상에 양반 같은 것은 없지만, 사회적 계층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어디를 나왔냐, 얼마나 배웠는지
하는 것에 상관 없이 생활할 수 있고, 기를 쓰고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야근이다 뭐다 하면서 살 필요 없는 여유 있는 나라, 집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들을 정말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선거판에 뛰어들어 국회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정치학이나 행정학 공부를 해서 이 나라를 뜯어고쳐야 하나요?
우리 모두 우리 나라,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잘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행복한 나라란 어떤 나라일까요? 우리는 그 표본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信者となった者たちはみないっしょにいて、いっさいの物を共有にしていた。
そして、資産や持ち物を売っては、それぞれの必要に応じて、みなに分配していた。
そして毎日、心を一つにして宮に集まり、家でパンを裂き、喜びと真心をもって食事をともにし、
神を賛美し、すべての民に好意を持たれた。主も毎日救われる人々を仲間に加えてくださった。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물건을 사도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대요? 예,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언제 모습입니까. 예,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초대교회 모습입니다.
이 얼마나 기쁨에 충만한 모습입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회, 초대교회와도 같은 사회를 인간의 힘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는 말합니다. 바로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 모형이 이 성경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유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재산이 아닌 모두 국가 소유의 재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주의 사회는 내가 내 능력껏 일을 할만큼만 하고,
일한 만큼 가져다가 쓰는 사회, 그리고 공산주의는 내가 내 능력껏 일을 할만큼만 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가 쓰는 사회라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비슷한 경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수입만큼 일정금액을 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
무엇이겠습니까. 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료보험, 건강보험이 바로 그와 같은 제도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료보험이라고 하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나 가능한 제도입니다.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그렇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고는, 집이
필요하니까 넓은 집을 사달라, 차가 필요하니까 고급 차를 사달라 한다고 모두에게 넓은 저택이나 고급 외제차를 사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무작정 글자 그대로만 따라 한다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이 사도행전 구절만 보고 이를 따라 한 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자,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는 있으나 북한 같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 독재국가에는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자유>는 어떻습니까. 미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쳤던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민들은 독재자들이 빼앗아간 자유를 되찾기 위해 오래 세월 동안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와 같은 자유는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자유가 있나요?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와 정반대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순종입니다. 복종입니다. 자유는 자기의 생각을 강조하지만 순종이나 복종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자신에게 내려지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온통 순종과 복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유로웠나요? 아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는 대로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요? 모세가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싶다고 했던가요? 아니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뭐예요? 예,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셔서 강제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는 순종했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땠습니까. 다윗이 언제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압적인 쓰임에 의해
사울한테 오랫동안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밤낮없이 사울한테 쫓기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도대체
내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나울까. 그냥 형들이랑 함께 지내면서, 양들이나 치고 편히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고달픈 삶을
살아가야 할까……하면서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가 없었던 대표적인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こころ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し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여기서 벌써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자유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유롭게 사역하러 오신 것이 아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니까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게 사실입니까. 성경에
보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ば、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のとおりにしてくださ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바로 밑에 44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실 정도로 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결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のとおりにしてください。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ました。
성경에는 자유가 아닌 온통 순종과 복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자본주의 사회에는 있으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나 독재국가에는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등, 민주주의, 권리,
다수결, 투표, 선거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역시 성경에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삭의 아들 중에서 형인 에서를 미워하고 동생인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이 평등인가요?
아닙니다. 지극히 불평등입니다. 민주주의요?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선거로 뽑혔나요? 아니면, 모세가 행진하는
방향을 다수결로 정했나요?
홍해가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들의 다수 의견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2절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 의견은 뭐였습니까. 쫓아오는 애굽 군대한테 항복 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법대로 하자면, 다수결의 원칙대로 하자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노예생활로, 종살이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人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し、海を分けて、イスラエル人が海の真ん中のかわいた地を進み行くようにせよ。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쓸데없는 생각 말아! 이스라엘 자손들을 홍해 쪽으로 가게 만들어! 홍해가 갈라지게 해!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도 없고 다수결도 없고 선거나 투표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자유도 없고 평등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자유나 평등이나 민주주의가 나쁜 것인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자유도 평등도 민주주의도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때문에,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에 자유도 평등도 민주주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민주주의 핵심인 다수결이 항상 올바르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요? 만약에 다수결이 항상
올바르다면 문제가 있는 정치인이 당선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을 보더라도 문제가 심각한 정치인이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들 다스리는 경우는 모두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수결이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지, 만약에 한 지도자가 완벽하고 항상 옳은 판단을 한다면 사실 민주주의도 필요 없고 자유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왜요? 그 지도자가 하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완벽한가요?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실수를 하고 후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사람이 하나님인 것처럼 독재를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고 민주주의를 짓밟게 된다면 이로 인해서 모든 국민들이 불행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없더라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께서는 혹시 연금술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고대 중세에 걸쳐 오랜 역사가 있는 이
연금술이라는 것은, 값진 금을 값싼 금속들을 섞어서 만들어보겠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는 성공할 수가 없었지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본래 금이라고 하는 금속은 여러 물질이 섞여서 만들어진 합금이 아니라 원자번호 79번, Au라고 하는 단일원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수 십 가지 수 백 가지 금속을 섞는다 하더라도 금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지상낙원을 꿈꿔왔습니다. 도원경, 무릉도원, 유토피아, 샹그릴라, 파라다이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을 무시한 채, 인간이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하나님 흉내를 내고자 하기 때문 다름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진짜 황금처럼 색깔을 칠하고 황금처럼 만들려고 해도 그것은 금이 아니듯이,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처럼 판단을 하고 하나님처럼
다스리려고 해도,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처럼 될 수 없듯이, 하나님 없는 지상낙원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낙원이라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께서는 혹시 지상낙원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상상하실 필요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8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狼は子羊とともに宿り、ひょうは子やぎとともに伏し、子牛、若獅子、肥えた家畜が共にいて、小さい子どもがこれを追っていく。
雌牛と熊とは共に草をはみ、その子らは共に伏し、獅子も牛のようにわらを食う。
乳飲み子はコブラの穴の上で戯れ、乳離れした子はまむしの子に手を伸べる。
여러분, 이런 세상이 말이 됩니까.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는 맹수입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먹는
무서운 동물이지요. 그런데 그런 무서운 맹수들이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사자들과
함께 놀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 킹 코브라 같은 독사들과 장난 친다는 것입니다. 이게 상상이 가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 흉내를 낸다 하더라도, 인간의 지식으로 어떠한 제도와 규칙을 만든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세상은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평화, 절대적인 평안이 우리 마음 안에
임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고민이
있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무슨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다니요, 저 그런 교만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요……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요
자기가 하나님 흉내를 내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전도하는 길에 대단히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눈앞에서 사자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자도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사자들이 닭고기를 뜯고 있었습니다. 글쎄요. 거리로 하면 10센티 정도? 10미터도 아니고 10센티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깝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사자들을 본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주변에도 젊은 여성분들도 있었는데, 피를 뚝뚝 흘려가면서 닭고기를 뜯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 귀엽네~>라고 하는,
정말 놀라운 말을 하면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ㅎㅎ 뭐, 짐작은 하셨겠지만, 사실 동물원에 갔었습니다. 전도하는 길에 기류 쪽에 가니까 무료 동물원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희
집사람이랑 잠시 들렀는데, 시간 관계상 다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참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그렇게 가깝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뭐 당연하겠습니다만, 투명한 유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리로 볼 수가 있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 유리는 투명해서 눈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분명 그 유리 덕분에 저희는 그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도 정말 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안 계신가요?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37장 5절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神は、御声で驚くほどに雷鳴をとどろかせ、私たちの知りえない大きな事をされる。
그리고 시편 121편 4절을 보십니다.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く、眠ることもない。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지상낙원을 만들려고 해 봤자 하나님 없는 나라는 진정한 지상낙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복된 삶을 살려고 해 봤자
하나님 없는 삶은 진정한 복된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축복에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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