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100회 편지로서의 사명

홍성필 2021. 6. 29.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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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회 편지로서의 사명
2017년 10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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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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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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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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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편지로서의 사명” 手紙としての使命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에 적힌 글입니다. 고린도후서라고 하는 것은 1장 1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가야지방과 아가야지방의 수도인 고린도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신학적인 지식으로서는 가치가 있습니다만, 단지 성경을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적으로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분들 중에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전설과 규범들이다,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이스라엘의 역사서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는 다윗과 솔로몬 등이 지은 노래다,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선지자들이 본 환상이다,

신약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행적을 적어놓은 기록물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놓은 역사서다.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 후서, 디모데전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은 바울이 각 교회에 보낸 서신들이다.
야고보서, 베드로전 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히브리서 등은 그 외의 제자들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 되었다가 본 환상이다.

이와 같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를 두고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단지 이렇게만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은 그야말로 세상인 지식, 세상적인 학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とのために有益です。

성경은 모두 직접적으로는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이는 단지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적힌 세상에 있는 책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성경은 바로 누구를 위해서요? 예, 바로 나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믿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보면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서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합니다. 그런데 성경 대로라면 가나안 사람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텐데, 그렇게 무참하게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채찍에 맞으시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나 하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죄 속에서 허덕이는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이 많아서, 그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을 것이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밖에 안 되니까 예수님의 은혜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0장 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また、あなたがたの頭の毛さえも、みな数えられています。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실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 수까지도 이미 새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미 우리를 자세히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세심하게 살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어떤 한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적힌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하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 나 한 사람 좀 구원해보시려고, 나 한 사람 좀 살려보려고 그와 같은 기록이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땅에 나 혼자 살았다 하더라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나를 위해서 오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도 나를 위해 맞으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나를 위해 달리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도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나를 위해 부활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도 나를 위해 승천하신 것이요, 성령을 부어주신 것도 나를 위해 부어주신 것이요, 장차 오실 예수님도 나를 위해 오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 말씀도, 단지 2000년 전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가야와 고린도 지방에 있는 성도들한테 보낸 편지일 뿐이고, 이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부모님의 부모님도 태어나시기 훨씬 전에, 주님께서 나에게 쓰신, 나 보라도 쓰신 말씀,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3章 3節
「あなたがたが私たちの奉仕によるキリストの手紙であり、墨によってではなく、生ける神の御霊 によって書かれ、石の板にではなく、人の心の板に書かれたものであることが明らかだから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쓰신 편지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그냥 쓰신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마음판에 쓰신 편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편지라고 하신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편지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겠습니다만,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그렇다면 과연 <편지>란 무엇인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글을 써서 그것을 서랍에 보관한다거나, 아니면 노트에 쓴 다음에 책장에 꽂아둔다면, 이는 편지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편지를 쓰는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보내기 위해서 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편지에는 반드시 보내는 사람과 받아보는 사람, 즉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습니다.

둘째로, 편지를 보낼 때에는 공짜로 보내주지는 않습니다. 내가 종이에 글을 쓰고 나 혼자서 보관한다 하면 비용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만,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얇은 엽서 한 장이라 한다 하더라도 돈을 내야지만 운반해줍니다. 편지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 즉 발신인이 반드시 비용을 지불해야지만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로, 편지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편지의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내용에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사진과 두꺼운 내용이라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담긴 내용이 없다면, 이를 눈여겨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편지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바로 그 편지 속에 담긴 내용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편지의 특징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가 편지라고 한다면, 우선 발신인과 수신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누구입니까.

예,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가 쓰신 편지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을 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주님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바로 온 천하에 있는 만민들, 바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긴 알지만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예전에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천하이고 우리 곁에 있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만민인 것입니다. 편지의 발신인 되신 주님께서는 그 만민이라고 하는, 이웃이라고 하는 수신인에게 <나>라고 하는 편지를 보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특징인 비용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나>라고 하는 편지를 보내시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하셨나요? 예, 지불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회사원인 경우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한다면 매월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지급됩니다. 그 이유, 즉 정해진 월급날에 월급이 나오는 이유는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회사에 고용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회사가 그 사람을 고용하고, 그 사람에게 월급을 주기 때문에 그 사람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월급 받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열심히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월급이 나와요. 왜 나옵니까?

그것은 지금은 비록 뚜렷한 성과가 안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할 것이다, 언젠가는 회사에 기여를 할 만한 인재가 되어줄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열심히 일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회사에서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왜 비싼 돈을 줘가면서 고용을 하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를 보면, 제 상사가 항상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회사원은 반드시 자신의 인건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건비라고 하는 것은 월급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회사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합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컴퓨터는 기본이겠죠? 그리고 볼펜이나 각종 문구류, 프린터, 종이값, 잉크값, 교통비……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 사람이 회사에서 근무하려면, 회사 임대료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기세, 냉난방비도 듭니다. 이것도 역시 인건비에 포함되어야 하죠. 이렇게 따진다면 직원 한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서 드는 비용은 대략 월급의 3배가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월급 30만엔을 지급하는 직원 하나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월급을 포함해서 총 90만엔이 든다는 것이지요. 이를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 직원이 회사에서 한 달에 90만엔어치 일을 해야지만 본전이라는 것이니까, 자신의 월급의 3배 이상의 일을 하는 직원이야말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능한 직원은 항상 내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회사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반면에, 유능하지 못한 직원은 어떻습니까. 내가 회사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맨날 월급만 적다고 불평 불만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는 어쩌다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죄악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아무 소리 못할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空の鳥を見なさい。種蒔きもせず、刈り入れもせず、倉に納めることもしません。けれども、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これを養っていてくださるのです。あなたがたは、鳥よりも、もっとすぐれ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무슨 동물 관련 방송을 보면요, 공중의 새들이 하루 먹이를 얻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아이구, 무슨,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만이 아니라 새들도 무척이나 힘들게 노력해야 하네……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거짓말이고 새들이 자기들의 노력으로 하루하루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면, 예를 들어서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자기들도 엄청 노력해서 먹이를 좇아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가 그 기르는 사람의 수고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저 하늘을 나는 새든, 그리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든,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거저가 아니라 모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편지의 내용입니다. 발신인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표값도 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시원찮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보겠습니까. 예전에 제가 학교 다닐 때에 보니까, 그 때가 정월이었는데, 어디서 연하장이 와 있었습니다. 발신인이 누군가 해서 봤더니 <청와대>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열어보니까 마침 그 때쯤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연하장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마도 저희 학교 중에서 4학년 학생들한테 다 보낸 것 같더라구요. 연하장 표지도 아주 멋있었습니다. 흰 바탕에 금색으로 봉황문양이 찍혀 있었고요. 대통령 서명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설마 거기에 직접 사인을 했겠어요? 새해 인사도 틀에 박힌 글이고, 서명도 다 인쇄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맨 처음에는 신기한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언제 어떻게 버렸는지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에 좋은 내용이 담겼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와 같은 편지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고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내용을 담아서, 어떤 내용을 전해야 할까요. 오늘은 일본 중의원 선거 날입니다. 어제까지는 후보들이 자신의 선거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찍어달라고 호소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당직자들은 자신의 선거구 만이 아니 아니라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주장을 말합니다.

저도 그런 모습을 보면요, 나도 정치를 좀 했다면 잘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 물론 절대로 안 해요. 그리고 생각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막상 해보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겠어요?

그 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여러 가지 내용도 그렇습니다만, 결국은 뭐예요? 내가 하면 잘할 수 있다. 나를 지지해달라. 우리 당이 하면 잘할 수 있다. 우리 당을 지지해달라……아니겠습니까? 이는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는 나라라고 한다면 어느 나라든지 후보들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사실 저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지지해주세요”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는 할 수 있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물론 본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쉽게도 극히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인가요? 아니에요. 일본이나 한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서, 적어도 몇 번 당선된 적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상당히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거 때 공약으로 내세운 것들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여당이나 야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국회의원도 그렇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못 나서 그렇다기 보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편지라고 하는 우리는 어떤 내용을 사람들에게, 만민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교회 좀 다녀본 분이라면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게 뭐예요? 지나가는 사람 만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읊어드려야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요?


지난 수요예배 때도 말씀 드린 것입니다만, 교회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너무나도 추상적인 말씀들을 하세요.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 결국 모르고 끝나게 됩니다.

정치인들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칠 내용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할 수 있다>입니다. 내 힘으로는 못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분들이 전도지를 들고 다니시면서 전하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평소에는 전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선거 때만 나타나서 찍어달라고 하면 누가 찍어주나요? 그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열심히 그 지역을 위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세상적으로만 살면서, 주일에만 교회에서 거룩한 척한다면, 전도할 때만 예수 믿는 척을 한다면, 누가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쓰신 편지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지로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께서 쓰신 편지가 되고,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지가 되어서,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삶을 통해서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믿음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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