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

[설교동영상/본문] 제286회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홍성필 2021. 7. 3.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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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회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2021년 5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4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1節~4節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3.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4.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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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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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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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2번째 시간으로서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 主との平和を持っている者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로마서 4장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김을 받았고, 그리고 이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서 하늘과 땅보다도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켜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를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자,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오늘 본문 1절~4절의 말씀은 앞 두 구절과 뒤 두 구절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2절입니다.


로마서 5장 1절~2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복습을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에이, 저는 그냥 천국에 안 가도 돼요. 그냥 교회 다니는 게 좋고, 성경 읽는 게 좋고, 예수님 믿는 게 좋아요.

여러분, 이게 겸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재수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결석하는 일도 없이 매일같이 부지런히 나와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하루는 그 재수학원 선생님이 그 학생한테, 자네는 어느 대학에 가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에이, 저는 대학에 간다는 그런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수업 듣고 공부하는 게 좋아서 학원 다니는 거예요.

만약에 그 학생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면, 여러분께서는 겸손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학생은 학원이 아니라 다른 원에 먼저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그러면서 대학에 갈 생각이 없어요? 이는 마치 열심히 병원에 다니고 치료 받고 약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는 겸손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주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돈이요? 시간이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를 금은보화가 아니라 이 세상 천하만물이라 하더라도 그 무엇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토록 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름 아닌 죄 많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요? 이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3절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用意し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がいるところに、あなたがたもい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을 보니까 작년 2020년 9월에는 평당 7천만원을 넘는다고 하더니만, 올해 1월에 보니까 이제 평당 1억이 넘고 2억 가까이 되는 곳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1평이 3.3제곱미터니까 1제곱미터로 환산해보면 평당 2억이라고 한다면, 1제곱미터는 대략 6000만원 정도라고 하겠지요.

사실 이게 상당히 비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비싼 곳도 있어요. 서울 명동의 경우를 보면 1제곱미터 당 2억650만원이라고 해요. 평으로 고치면 2억원이라고 해도 곱하기 3.3이면 평당 6억 6천만원입니다. 강남 아파트값의 3배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일본은 어떤가 하면 동경 긴자에 보면 15년 연속으로 땅값 1위를 한 곳이 있습니다. 긴자 4쵸메에 있는 야마노 악기 긴자 본점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코로나 때문에 가격이 하락 했대요. 그 가격이 얼마냐 하면 1제곱미터당 5360만엔이라고 합니다. 단순계산으로 원을 10배라고 한다면 제곱미터당 5억3천만원이 넘는다는 것이지요. 평당 가격으로 한다면 5억3천만원 곱하기 3.3을 하면, 긴자 4초메에 있는 여기 땅값은 평당 17억 4천 9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긴자에 있는 땅값이 평당 17억 4천 900만원. 강남 아파트가 평당 2억. 이렇게 생각하면 강남 아파트가 상당히 저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마찬가지이냐 하면, 평당 1억을 하든 10억을 하든 간에, 우리 같은 서민들이 당장 주머니에서 척 하고 돈을 내서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비해주시는 곳이 그런 강남이나 긴자에 있는 땅값에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가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가 거할 집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곳의 평당 가격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무척 비싸겠지요. 하지만 전혀 감이 안 잡히나요? 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격은 바로 예수님의 핏값이요 예수님의 생명의 값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의 핏값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할 곳이 하나님 나라에 예비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에게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로마서 5장 1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5장 1절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こうし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平和を持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제물로 되어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는 그야말로 원수지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인해서 이제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지간이 아니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장차 우리의 생을 마친 뒤에 크나큰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인가요?

굳이 이름을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유명한 신학자입니다만, 이 분의 책을 제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분의 책을 접하게 되어서 잠시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책 내용은, 말하자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인데, 여기서 인용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이 구절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현세에 있어서의 가난함은, 내세에 있어서의 풍요로움으로 보답 받는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첫 페이지였는데, 여기까지 읽고 책을 닫아버렸습니다. 물론 더 읽어가면 좋은 말씀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책을 보면 배울 점도 많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읽고 제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일본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일본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잠시 미국에 오셨는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살았긴 했습니다만, 일본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일본 교회 사정을 잘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는데, 이 목사님이 일본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제게 말씀해주시기를, 이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일본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닌데요. 봉사도 열심히 하신데요. 그런데 그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교인들이 지쳐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이 목사님 개인적인 소감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 교회를 섬겨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본 신학자의 글을 읽는 순간, 그 원인을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은 워낙 유명한 분이시기 때문에 아마도 일본 목회자라면 대부분이 이 분의 책을 읽지 않았나 합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면 큰 기쁨이 있고 큰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가기 전에는 그저 고생만 해야 되고 고난만 당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야만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에 축복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에서는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일본 기독교인이 지쳐있다는 말씀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까 재수학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대학에 들어가면 큰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나, 지금부터 몇 년 동안, 몇 십년 동안 재수생활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기쁨이 있겠습니까? 아니요. 저도 재수생활을 해봤습니다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재수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이고 고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8절~30절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すると、ペテロが言った。「ご覧ください。私たちは自分のものを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来まし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だれでも、神の国のために、家、妻、兄弟、両親、子どもを捨てた者は、
必ずこの世で、その何倍も受け、来たるべき世で、永遠のいのちを受け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만, 꼭 자기 집이나 가족을 버려야지만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 그것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에 대한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받을 축복이 꼭 죽은 다음에 받는다고 하시나요?

마지막 누가복음 18장 3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0절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必ずこの世で、その何倍も受け、来たるべき世で、永遠のいのちを受け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받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면서 받을 축복도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영혼은 잘 됩니다. 나중에 우리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도 우리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2절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今立っているこの恵みに導き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神の栄光にあずかる望みを喜んでいます。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은 슬픔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기쁨의 발걸음입니다. 좌절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은혜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절망의 발걸음이 아니라 소망의 발걸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은, 이미 우리가 서 있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제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분은 이러실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어떻게 사람이 마냥 기뻐만 하고 즐거워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요즘 같은 코로나 상황을 보시면 정말 답답합니다. 아니, 하나님도 참 너무 하시지.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그런 마음이 왜 안 생기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이 밀려올 때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3절~4절까지 말씀입니다.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3.それだけではなく、苦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苦難が忍耐を生み出し、
4.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私たち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목적입니다. 이 3절~4절 중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3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씀이 나오고 4절에서는 ‘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환난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아, 나는 환난이 너무 즐거워, 고생이 너무 즐거워,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드려야 되다고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이를 단순하게 말씀 드리자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목적’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니면 환난에 대해서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소망 뿐인가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죽도록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토록 원하던 후사를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적게 잡아 25년 이상이나 후사를 원했던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구원해주신다. 나를 기억해주신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무엇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눈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내 눈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난이 다가와도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인내의 연단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큰 소망을 갖도록 하시는 것이 환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누가 아는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환난을 허락하실 때, 아, 이 환난은 나로 하여금 인내를 하게 하시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바라보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구나, 라는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누가 압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을 했을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들을 수없이 직접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이것이 없다, 저것이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자기들이 만든 우상을 섬깁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닌리를 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꿈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진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신 이유가, 그들의 말처럼 광야에서 그들을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환난 가운데에서 죽이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셨고, 이 세상 천하만물을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진 자가 아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로서, 어떠한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그 안에서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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